한국일보

종이책

2017-09-23 (토) 김영수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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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가 켜지지 않는다. 뭐가 잘못됐을까 생각하기도 전에 겁부터 난다. 아무것도 할 수 없으리라는 막막함이 생각을 가로막는다. 세상을 향한 창이 갑자기 닫혀 빛 한 줄기 들어오지 않는 암흑 속에서 헤매는 기분이다. 컴퓨터 기능을 많이 활용할 줄 몰라서 글을 쓰는 외에는 그저 몇 가지 도구를 사용하고 메일로 소통하는 정도인데도, 늘 다니던 길을 잃어버린 것처럼 난감하다.

노트를 펴고 평소에 메모해 둔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나는 글을 쓸 때 처음부터 컴퓨터에 입력하지 않는다. 습관들이기 나름이겠지만 종이에 써야 쓰는 맛이 나고 생각이 잘 풀려간다. 오늘처럼 막막한 날, 컴퓨터가 없어도 하던 일을 계속할 수 있는 건 그 동안 종이 노트에 글을 써둔 덕분이다.

대부분 컴퓨터로 글을 쓰는 요즈음은, 연필과 펜으로 종이에 초고를 쓰고 지우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된다. 나는 처음과 끝은 종이에 의존한다. 떠오르는 단상을 메모할 때와 글이 완성되었을 무렵 출력하여 퇴고하는 작업은 종이 위에서 이루어진다.


컴퓨터 모니터에는 과정은 사라지고 결과만 남는다. 반면에 종이 글은 시작부터 밟아온 흔적을 훑어보며 다시 생각해볼 기회가 있다. 줄을 그어 지워도 줄 밑에 눌린 문장들은 그대로 살아있다. 종이째 구겨 던져버린 것도 다시 펼쳐보면 구겨진 채로 글자가 숨을 쉬고 있으므로 소생의 여지는 있는 셈이다.

미처 손이 따라잡지 못할 만큼 생각이 술술 풀리는 경우에는 컴퓨터를 이용하는 게 낫다. 그러나 종이책과 전자책을 읽을 때 느낌이 다르듯이, 손으로 만져가며 종이에 펜으로 쓰는 경우와 가상의 공간에 타이핑하는 경우 촉각이 주는 정서적 차이는 무시하기 어렵다. 글씨를 쓰거나 책장을 넘길 때 종이가 내는 소리와, 손이 닿을 때의 질감이나 냄새를 어떻게 전자 매체가 대신할 수 있겠는가.

전기 없이 읽는 종이책과 종이 없이 읽는 전자책은 마치 유전인자가 다른 형제 같아 보인다. 나무와 종이로 만든 종이책이냐 모니터 안에서 기호와 빛으로 존재하는 전자책이냐에 따라 책을 읽을 때 여러 면에서 차이가 있을 거라는 추측은 어렵지 않다. 읽고자 하는 책을 통해 무엇을 얻을 것인가를 먼저 생각한 후에 어떤 방법으로 읽을지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독자의 연령층과 책 내용에 따라 선호도가 다르겠지만, 나는 오래 생각하며 읽어야 하는 경우 특히 문학이나 철학은 종이책으로 읽는다. 같은 책을 읽는 경우에도 환경에 따라 몰입 정도나 상상력의 범위가 다르다. 장소에 따른 소음이나 물건이 산재해 있는 경우는 물론이고 조명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책의 내용에 따라 독서하는 공간을 고려할 필요를 느낀다.

독서는, 작가의 혼이 숨어있는 책을 찾아내어 책 뒤에 숨겨진 영혼과 대화하는 시간이다. 그러므로 단순히 조명 하나에도 상상력이 무한히 펼쳐지고 사고가 확장되며 깊어지기도 하고, 반대로 제한되거나 축소되기도 한다는 논리는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손바닥만 한 크기에 몇 만 권도 넣을 수 있는 전자책에 비해 종이책은 부피가 커서 보관할 공간이 마땅치 않다는 단점이 있다. 그러나 책장 가득 꽂혀있는 책을 바라보는 기쁨도 적지 않다. 영혼을 흔들던 책, 두고두고 다시 읽고 싶은 책들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뿌듯한 충만함을 느끼지 않는가.

어떤 물건을 소유하고 어떤 취향이 있느냐를 보면 그 사람의 정체성을 파악할 수 있다. 애독하는 책만큼 주인의 정체성을 잘 드러내는 것도 없지 않을까. 과시용이 아니라면 실제 어떤 책을 즐겨 읽는 지로 책 주인의 사상과 삶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다.

책은 언어로 표현한 작가의 철학을 담은 그릇이다. 인간이 살아가는데 먹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삶의 철학이라면, 같은 책을 좋아한다는 의미는 비슷한 인생관과 가치관을 갖는 그 이상일 수 있다. 그런 사람과의 동행이라면 세상을 사는 일이 한결 수월하지 않을까.

그런 관계 맺음은 종이책 세상에서 가능한 일이다. 전자책으로 인간적인 교류를 꿈꾼다면 그건 환상이 아닐까 싶다. 나날이 새롭고 편리해지는 문명의 혜택에 감사하며 살고는 있으나 때로는 길들여진 편안함보다는 낯설고 불편한 원시 환경이 그립기도 하다. 자연이 키워낸 나무에서 얻은 종이에 글을 쓰고 나무 냄새가 배어있는 책으로 영혼이 춤추게 하는 꿈은, 머지않아 단어 그대로 꿈이 되지 않을까 싶다.

<김영수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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