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질 수밖에 없었던 힐러리

2017-09-13 (수)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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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에서 배우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실패라고 몇 주 전 칼럼에서 썼다. 두 번이나 대통령 선거에 나섰다가 패배한 힐러리 클린턴은 이 주제에 딱 들어맞는 사례다. 클린턴은 이번 주 발간된 2016년 대선 캠페인 회고록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What Happened)에서 “나는 신중하게 생각해 낸 정책, 공들여 구축한 연합과 함께 전통적인 대선 캠페인을 펼쳤지만 트럼프는 미국인들의 화와 분노를 능숙하게 그리고 가차 없이 부추긴 리얼리티 TV쇼를 했다”고 평가했다.

행간에서 트럼프의 캠페인 방식에 대한 경멸과 불만이 고스란히 읽혀진다. 클린턴은 패배의 책임이 전적으로 자신에게 있다고 말했지만 무엇이 패배를 자초한 것인지에 대한 자각은 여전히 부족해 보인다. 클린턴이 저지른 가장 큰 실수는 무엇이 유권자들을 움직이게 하는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런 인식은 ‘정책’과 ‘연합’, 그리고 ‘전통적 캠페인’이라는 언급에서 잘 드러난다. 클린턴은 합리적인 아이디어와 좋은 정책으로 유권자들에게 호소하면 충분히 먹힐 것이라 판단했던 것이다.

하지만 유권자들은 클린턴의 이성적 호소가 아니라 분노를 자극하는 트럼프의 원초적이고도 감정적인 호소에 더 뜨겁게 반응했다. 어차피 골수지지층 표심은 바꾸기도 힘들고 바뀌지도 않는다. 대다수 유권자들은 이슈가 아닌, 느낌으로 후보를 고른다. 그래서 승패는 많은 경우 누가 더 감정적인 호소로 부동층을 움직이는가에 따라 갈린다.


클린턴은 이것을 오래 전 한 차례 뼈저리게 경험한 바 있다. 정치 애송이 오바마와 맞붙었던 2008년 민주당 경선에서다. 오바마의 백악관행을 이끌어 낸 것은 풍부한 경험 같은 개인적 이력이나 훌륭한 정책이 아니었다. 그가 말한 ‘희망’과 ‘변화’가 유권자들의 가슴을 뜨겁게 달구었기 때문이다. 별 능력 없는 조지 W 부시가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것 역시 ‘온정적 보수주의’라는 구호로 폭넓게 유권자들 마음을 파고들었기에 가능했다.

2008년의 실패에서 클린턴은 정치를 움직이는 가장 강력한 동력이 무엇인지 배웠어야 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러면서 똑같은 실수를 반복했다. 이단아 이미지의 정치신인 트럼프가 지난해 공화당 예선에서 ‘전통적’ 후보들을 잇달아 넉아웃 시키는 걸 보면서도 제대로 깨닫지 못했다.

안타깝게도 클린턴은 대중의 정서와 유리된 채 과거 방식(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전통적인 방식)의 캠페인에만 매달렸다. 그래서 해보나마나 클린턴이 손쉽게 이기는 선거가 될 것이란 전망이 압도적일 때, 클린턴이 패배할 수도 있다는 조심스런 관측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는 권력의 핵심부에 20년 이상 있었지만 막상 정치의 본질은 잘 이해하지 못했다.

이처럼 클린턴에게는 백악관행에 필요한 전략적 각성을 얻을 수 있었던 두 번의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두 번 다 그냥 흘려보냈다. 실패한 방식을 되풀이 하면서 결과가 달라지길 바란다면 그것은 정말 어리석은 기대다.

대통령이 되는 것과 좋은 대통령이 되는 건 다른 전략을 요구한다. 좋은 대통령이 되는 데는 깊은 정책적 이해와 실행력 등이 두루 필요하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대통령에 당선돼야 한다. 문제는 대중의 선택이라는 관문을 통과하는 데는 이성적 자질보다 그들의 마음을 흔들고 투표장으로 이끌어 내는 감성적 자질이 한층 더 강하게 작용한다는 사실이다.

어떤 정치인들은 이미지와 감성을 무기로 대중의 선택은 받지만 결국 소양과 자질의 바탕이 드러나면서 당선되지 않음만도 못한 처지가 되곤 한다. 반대로 역량은 갖췄지만 선거라는 관문을 통과하는 데 실패해 쓸쓸히 사라져 간 아까운 인물도 많다. 클린턴은 후자에 속한다.

클린턴이 당선됐더라면 미국을 훨씬 안정적으로 이끌었겠지만 아쉽게도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황금 같은 기회를 허무하게 날려 버리고 말았다. 실패의 교훈 또한 충분히 가치 있는 정치적 유산이 될 수 있지만 클린턴의 실패는 그 결과의 혹독함 때문에 한층 더 안타깝게 다가오는 게 사실이다.

yoonscho@koreatimes.com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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