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교육칼럼

2017-08-23 (수) 01:43:35 대니얼 홍 편집위원
크게 작게

▶ 백 투 스쿨

종교가 고달픈 사람에게는 지팡이가 되고, 방황하는 사람에게는 북극성이 되고, 삐뚤어진 길로 들어선 사람에게는 방망이가 된다. 그런데 종교가 누구에게나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을까. 또 그렇게 역할을 해야만 할까. 종교가 어떤 이에게는 결정적인 도우미역할을 하지만 어떤 이에게는 마약 같은 존재가 되고, 어떤 이에게는 무용지물이다.

학교도 마찬가지다. 어떤 학생에게는 학교가 길라잡이가 되고 어떤 학생에게는 자신의 역량을 보여주는 공연장 역할을 하지만 모든 학생들에게 긍정적인 도움을 주는 곳은 아니다.

학교라는 곳은 부모가 더 이상 가르치거나 훈련시킬 수 없는 시기부터 시작해서 생계유지를 할 수 있는 직장을 얻을 때까지 자녀를 맡아 두는 곳이다. 그런데, 학교에서 가장 먼저 배우는 것은 자신과 다른 학생들을 비교하는 것이다. 여름방학 동안 다른 학생들은 선행학습도 하고, 여기저기 여행도 다녀오고, 신형 휴대폰과 노트북도 구입했는데, 나는 무엇을 했나. 나는 부족하고 낙오자가 되어간다는 느낌은 학기 중간에 시험을 치른 후 더욱 강하게 다가온다.


누군가 자신을 물건 취급한다면 기분 좋을 사람은 없다. 물건이 아무리 고급지다 한들 모든 물건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기 때문이다. 필요에 따라 수단은 언제든지 교체 혹은 처분할 수 있다. 만일, 그런 편리를 위한 수단 자체가 목적으로 변질된다면 어떻게 될까. 학교시험점수는 학생의 인지능력을 측정하는 수단이다. 그런데 그 점수가 학생 위에 군림한다면, 즉 교육의 목적이 학생이 아니라 점수라면 파생되는 결과는 무엇일까. 소외현상이다.

학교의 문제는 소외현상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학생들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소외를 불러오는 대상인 점수를 숭배하고 그 점수를 따내려고 몸부림친다. 점수를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이라고 학생들은 여기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런 보물은 아무도 찾지 않는다는 현실을 모른다. 몸부림치는 과정에서 희망에 속고 기대에 어긋나기를 수 차례 겪으면서 기가 꺾인다. 그리고 불안에 사로잡혀서, 자신이 지닌 약점이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파고들면 보물이 제공하는 것보다 훨씬 더 높이 멀리 갈수 있는 길을 볼 수 없게 된다.

물건 취급의 또 다른 결과는 학생의 태도다. 백 투 스쿨 세일에서 샀다고 신형 셀폰을 자랑하지만 그 태도에는 감성이 삭제되었다. 우리가 커피를 마실 때 커피 한잔 속에 제 3세계의 어린 노동자가 보낸 고달픈 하루가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처럼, 학생도 셀폰이 자신의 손에 들어오기까지 과정은 염두에도 없다. 임금착취에 시달리고 독성 화학물질에 노출되어 건강을 해치며 조립공장에서 근무하는 직원들, 그리고 세금을 피하기 위해 다양한 꼼수를 피우는 다국적기업들이 보여주는 양극화된 인간의 현주소는 모두 삭제되고, 셀폰의 신기능에 넋을 잃고 즐기기 바쁘다.

나아가, 학교에서는 사회생활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인간관계를 가르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을 사랑하고, 어떻게 사람을 설득하고, 어떻게 싫은 사람을 멀리하고, 어떻게 상대방의 마음을 이해할까 등 삶에서 가장 중요한 기술은 가르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름방학이 끝나면 모두 학교로 돌아간다. 왜일까. 종교는 옵션이지만 학교는 모두가 따라야 하는 의무교육이라는 굴레 때문일까. 좀더 큰 이유는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를 어찌할 줄 몰라 여름방학 때 모두 낭비한 후, 그 자유를 반납하러 가는데 있다.

<대니얼 홍 편집위원>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