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양비론’의 교활함

2017-08-23 (수)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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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트럼프를 정치적 곤경으로 몰아넣고 있는 것은 러시아와의 내통 스캔들이 아니다. 버지니아 샬러츠빌에서 폭력시위를 벌인 백인우월주의자들과 그들의 공격 대상이 됐던 시위대를 싸잡아 비난한 ‘양비론’적 발언이다. 폭력시위 발생 후 백인우월주의자들을 명확하게 비판하지 않아 후폭풍을 맞았던 트럼프는 마지못해 “인종차별은 악”이라며 백기를 드는 듯 했지만 곧바로 다시 “두 편 모두에 책임이 있다”고 말을 바꿨다. 트럼프의 발언은 인종차별 세력을 두둔한 것으로 해석되면서 그를 궁지에 빠뜨렸다.

트럼프가 백인우월주의자들에 우호적이라는 건 비밀이 아니다. 이들은 트럼프의 가장 견고한 지지층이자, 불가능해 보이던 그의 백악관행을 견인해 준 공신세력이다. 샬러츠빌 테러는 누가 봐도 명백한 범죄행위다. 그럼에도 트럼프는 자신의 집토끼들을 자극하지 않겠다는 정파적 판단에 매몰돼 국가지도자로서의 도덕적 책무를 저버렸다. 트럼프의 발언은 성범죄자를 비판하면서 “짧은 치마를 입은 피해자가 원인제공을 한 측면도 있다”는 식으로 사족을 붙이는 것과 다르지 않다.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는 정파의 이익을 대표한다 해도 일단 대통령이 된 다음에는 보편적 가치를 지켜야 한다는 건 상식이다. 트럼프의 기회주의적 발언은 ‘양비론’이 얼마나 교활한 수사법인지, 또 그런 수사법이 정치를 얼마나 멍들게 하는지를 실증해 주는 사례이다.

양비론은 이쪽도 나쁘지만 저쪽도 잘못했다는 식으로 지적하는 논리를 이른다. 영어로는 ‘bothsidesism’이다. 양쪽을 뜻하는 ‘bothsides’에다가 무슨 주의를 뜻하는 ‘ism’을 붙인 것이다. 직역한다면 ‘양쪽주의’쯤 된다. 양쪽을 다 꾸짖는 게 얼핏 보기에는 상당히 공정한 것처럼 보인다. 싸움에서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100% 잘하거나 잘못한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그러나 양비론의 위험은 이런 형식적 공정성에 있다. ‘큰 잘못’과 ‘작은 허물’에 대등한 책임의 비중을 부여함으로써 문제의 본질을 흐리고 “그러니 둘 다 문제”라는 식의 결론으로 유도한다. 그래서 언론과 정치권이 ‘물타기’에 양비론을 즐겨 사용하는 것이다.

프랑스에 오래 거주한 언론인 홍세화씨가 어느 책에서 밝힌 내용이 생각난다. 프랑스 부모들은 싸움의 원인을 찾아 누가 더 잘못했는가를 따지는 태도를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반면 한국 부모들은 싸움 자체를 문제 삼는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잘못의 크기와 관계없이 당사자들 모두 똑같이 잘못한 게 된다.

홍세화씨의 관찰을 조금 더 확대해 보면 한국 언론의 양비론은 거의 남용 수준임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일부 보수신문의 양비론 생산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논리가 어찌나 정교하고 교묘한지 고개를 주억거리지 않기 힘들 정도다.

이런 양비론의 해악이 가장 두드러진 분야가 정치다. 정치와 관련된 양비론 뉴스는 어김없이 “타협할 줄 모르는 정치” “민생은 뒷전, 싸움질만 벌이는 정치권” 같은 결론으로 이어진다. 그러면서 정치에 대한 혐오와 기피가 자연스레 확산된다.

지난 미국대선에서 트럼프 현상을 가능케 했던 요인들 가운데 하나는 언론의 양비론적 보도였다. 언론이 후보들 사이의 자질 차이, 잘못의 경중, 흠집의 대소를 제대로 구분하려 하기보다 뭉뚱그려 “두 후보 모두 분열적”이라는 식으로 보도하면서 트럼프는 결점의 상당 부분을 흐릴 수 있었다. 그렇게 대통령이 되더니 그 자신도 논점을 흐리는 양비론의 늪에 깊이 빠져 있는 것 같다.

양비론이 처세술로는 유용할지 몰라도 시시비비를 분명히 가리고 진실을 말해야 할 위치에 사람들에게는 항상 경계해야 할 유혹이다. 비이성적 폭력 앞에서도 기계적인 중립을 지키는 데만 몰두하고 있는 트럼프에게는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한 구절이 조언으로서 딱 어울릴 것 같다. “지옥의 가장 뜨거운 곳은 도덕적 위기의 시대에 중립을 지킨 자들을 위해 예약되어 있다.”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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