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변하지 않는 것은…

2017-08-19 (토) 유정민 카피라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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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오랜만에 한국에 가서 KTX를 타고 엄마와 함께 목포에 다녀왔다. 기차역에 내렸을 때 엄마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그 옛날의 목포역은 어디 갔느냐“ 며 황당해하셨다. 결국 지나가던 아저씨에게 묻고 그 역이 바로 지금 서있는 이곳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도 믿지 못해 하셨다.

50여 년 전 젊은 시절에 잠시 살았던 엄마의 목표 추억여행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엄마가 기억하는 한 초등학교 근처를 가서도, 형체조차 없어진 중앙시장 터를 둘러볼 때도, 각지에서 수많은 배들이 물건을 떼러 오던 항구를 지날 때에도, 엄마는 세상에 세상에...를 연발했다.


수많은 상인들이 물건을 하러 오고 엄마의 엄마도 이곳으로 오곤 했었던, 엄마가 회상하는 그 곳이 모두 생각 속의 모습과 다르게 변해버렸기 때문이었다.

혹시나 예전의 모습이 남아있는 곳이 있을까 하여 오래전 기억을 더듬으며 유달산에 오르고, 살던 동네가 어디쯤이었을까 되짚어 가보면서, 한때 물류의 중심이었던 항구도시 목포의 번영과 퇴락을 산 증인의 감탄과 아쉬움을 들으며 목격했다.

택시를 탔을 때 운전기사들은 하나같이 목포는 이제 끝났다고 한숨 섞인 말들을 토해냈다. 목포를 일으키고 일자리를 만들던 회사들이 모두 문을 닫았고, 일터가 줄어 사람들도 떠났으며, 시내에는 이제 늙은이들만 남아 있다고 했다. 일자리도 없고, 기업도 없으니 이 도시를 어찌 하냐며 혀를 찼다.

다리가 새로 놓이면서 더 이상 배들이 아닌 차로 이동이 가능해지니 항구도시로서의 명분이 사라졌다고 했다. 새로 생긴 시가지에 아파트들이 들어서서 모두 그리로 갔다고 하는데 그래도 아쉬움이 남아 구 시가지를 한나절 걸었다. 정말 고스트타운 처럼 건물들은 텅 비어있고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목포의 맛집 몇 군데를 돌며 쓸쓸해진 마음을 달래고 서울로 돌아온 후 나는 초등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회사 동료들을 만나느라 정신없이 바빴다. 내가 알던 동네는 모두 아파트가 들어서서 달라졌고, 고등학교도 장소를 이전했으며, 조용한 주택가였던 곳은 하나같이 상가처럼 변해버려 가는 곳마다 먹고, 마시고, 구경할 거리가 가득했다. 고등학교 때 방과 후 조용히 걸어서 집으로 가던 길, 친구 집에 몰려가던 거리는 완전히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번화가가 되어있었다.

달라진 길을 30년 전의 마음을 그대로 기억하는 친구들과 함께 걸었다. 목포에서 엄마가 느꼈을 그 황망함을 가슴속에 담은 채, 어머 여기가 이렇게 됐구나... 언제 이렇게 바뀐 거야... 생각하며 다녔다.

옛날 어느 시조인가,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 데 없다는 구절이 상전벽해와 함께 떠올랐다. 상전벽해, 뽕나무 밭이 변해 푸른 바다가 된 것은 맞는데, 시조에서처럼 인걸은 간데없지는 않은 것 같았다.


요즘은 모든 게 너무 빨리 변하는 시대라, 사람이 세상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서일까. 오히려 변하지 않는 것은 사람이구나 싶다.

엄마도 옛날 고향친구를 목포에서 우여곡절 끝에 다시 만나 반갑게 손을 잡고 어린 시절 얘기를 주고받았고, 나 또한 30년, 20년, 10년 전 학교 다니고 함께 일하며 추억을 만든 친구들, 동료들을 다시 만나 여전히 그때 이야기를 하며 웃었으니 말이다.

변하지 않는 것은, 그래서 이제는 산천이 아니라 마음을 함께 나눈 사람들이 아닐지. 겉모습은 늙어가겠지만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 있을 것이기에 마음이 놓인다.

그리고 그들이 있는 한 아무리 서울이 몰라보게 달라져도 나의 한국행은 언제나 즐겁고 설레는 일이다.

<유정민 카피라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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