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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미주한국일보 문예공모전 단편소설 당선작] ‘그 아버지의 딸’ 구원

2017-08-17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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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씨, 폴형, 때로는 저기요, 그리고 한때는 아빠라고 불리던 한평준씨는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어둑한 레스토랑에서 그나마 조그만 햇빛이 보자기처럼 펴져있는 창가 자리를 향해 절뚝거리며 걸어갔다. 먼지 낀 창문 밖으로 보이는 가을의 하늘은 회색 구름에 가려져 있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도 유난히 짙은 안개가 만년설 마냥 두텁게 껴있는 아우터 선셋의 여느 가을 하늘이었다. 창문의 크기와 모양 따위가 조금씩 다를 뿐 비슷비슷한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빛바랜 페인트 색깔로만 자기 집의 개성을 드러낸 동네의 전경이 묽은 회색 물감으로 한 번 덧칠이라도 해진 듯 뿌옇게만 보였다. 사실 뿌연 것은 폴씨의 눈이었는지도 모른다. 요즘 들어 시야도 뿌예지고 정신도 더 멍해져서 병든 병아리 같다고 같이 일하는 직원들에게 자주 타박을 당하는 폴씨였다. 누군가 레스토랑 문을 열고 들어올 때면 잿빛 하늘을 수많은 마름모로 쪼개 놓은 전깃줄을 흔들던 바닷바람이 새치기를 하듯 들어와 폴씨의 뼈속으로 파고들었다. 그의 보잘것없는 몸뚱이보다 두 사이즈 정도 큰 파카 안에 묻혀 있는 듯이 보이는 폴씨는 레스토랑 바깥의 테이블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는 두 백인 남녀를 부러운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20년 넘게 담배를 펴왔던 그가 두 달 전 금연을 결심하게 된 계기는 스스로의 건강을 지키려는 마음보다는 홧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가벼운 천식 증세때문에 하루에 한 갑 피던 담배를 일주일에 대여섯 까치로 줄이긴 했지만 가끔 피는 담배는 오늘이 어제 같고 또 내일이 오늘 같을 그에게 있어서 포기하기 싫은 작은 행복이었다. 소리 소문 없이 찾아온 그의 49번째 생일날 함께 일하는 설거지 직원이 멕시코 산이라며 선물한 담배는 목을 쓸고 내려가는 느낌이 부드럽고 맛이 좋았다. 하지만 그날 저녁에 손님 중 누군가 스시맨에게서 담배 냄새가 난다는 불만을 옐프에 별 하나와 함께 올렸고 폴씨의 죽은 아내의 언니이자 현재 그의 상사인 박여사는 근무시간 동안 직원들은 일체 담배를 피우면 안된다는 새로운 조항을 공표했다. 무언가 분한 마음에 아예 담배를 끊겠다고 선포한 폴씨는 지금 몹시도 담배가 피우고 싶었다.

침을 꿀꺽 삼키며 흩어지는 담배 연기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는 폴씨의 얼굴에는 혼자 오래 산 사람들에게서 느껴지는 쓸쓸한 초연함이 어려있었다. 오랜 흡연으로 푹 꺼진 볼과 세월이 지나며 점점 더 깊이 들어간 눈의 그림자는 길고 각진 그의 얼굴에 마치 해골과도 같은 인상을 주었다. 다리를 다치기 전까지 루퍼로 일하면서 하늘과 가까이한 세월에 바싹 타버린 그의 얼굴은 늦가을 땅에 떨어진 나뭇잎의 색깔이었고 마른 잎사귀의 잎맥 같은 주름들이 사방으로 뻗어있었다.

폴씨는 피곤했다. 한 주에 한 번 있는 휴일에는 일하는 날보다 오히려 피로가 배로 느껴졌다. 여느 휴일이었다면 새로 장만한 전기장판에 몸을 지지며 하루 종일 누워있었겠지만 3년 만에 연락이 닿은 딸 제니를 만나기 위해서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SAT시험을 몇 주 안 남긴 어느 날 제니는 대학에 갈 마음이 없다고 선포를 했었다. 하고 싶은 것도 없는데 왜 굳이 대학에 가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제 어미가 고집을 부리곤 할 때와 똑같은 표정으로 눈을 부릅떴었다. 처음으로 딸에게 소리를 질러 본 그에게 제니는 “아빠가 내 인생에 관여할 자격이 있어?” 하고 되물었었다. 너를 여태 먹여 살려주지 않았냐고 했지만 말이 나오는 순간 그것이 아이가 필요한 전부는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고 자위했다. 돈을 벌기 위해서는 하루 종일 일을 해야 했고 지긋지긋한 일이 끝나면 항상 피곤했다. 아내의 죽음 후 납덩이 같은 우울증에 시달리기 시작한 그는 때론 고의로 딸과 얼굴을 마주치는 것을 피했다. 딸의 꿈과 관심사보다는 진공으로 빨려 들어간 듯한 자신의 인생에 대한 후회와 부서진 야망에 더 매달렸던 그는 어느 순간부터, 아니 어쩌면 아주 오래전부터 제니의 인생에 관여할 수 있는 자격과 의무를 포기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졸업 후 기다렸다는 듯이 집을 나간 후 소식을 끊어버린 제니가 잘 살고 있다는 소식을 박여사를 통해 듣는 것에 만족하며 먼저 연락을 하지도 않았다. 가끔씩 옛날 생각이 날 때에는 드라이아이스로 만든 송곳에 찔리는 듯한 통증이 가슴 한구석을 얼얼하기도 했지만 나이가 들며 점점 더 빨라지는 시간 탓인지 반 년이 곧 일 년이 되고 무려 삼 년이나 딸의 얼굴을 못 보고 지나간 세월도 그저 작은 터울같이 느껴졌던 것이다. 얼마인지도 모르는 시간 동안 딸 생각을 안 하고 지내다가 제니와 비슷한 또랑또랑한 목소리의 여자 손님을 보고 불현듯 딸의 얼굴이 떠오를 때면 부모 자식 간의 정도 별거 없구나 하며 쓸쓸해지기도 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감 시간에 사시미칼을 갈고 있는 와중에 박여사가 뜬금없이 제니가 좀 보자고 한다고 했을 때는 너무 놀라 손을 벨 뻔했었다. 혹시 무슨 비보라도 있는 것인가 손과 발 끝이 차가워지며 식은 땀이 났었다.

창문 너머로 새하얀 BMW에서 내려 걸어오는 제니가 보였다. 3년 만에 보는 제니는 어둑한 구름 뒤에 가려진 해보다 더 밝은 빛과 에너지를 발산하듯 건강해 보였다. 얼굴만으로 봤을 때 제니는 폴씨를 많이 닮았다. 그의 각진 얼굴과 두툼한 입술, 그리고 살짝 흰 매부리코까지. 눈만큼은 엄마를 닮아 시원하게 크고 미묘하게 위로 올라가 있었다. 제니가 사춘기로 접어들며 얼굴이 잡혀가기 시작할 무렵 폴씨는 딸이 엄마를 더 닮았었으면 했었다. 딸의 얼굴을 봐도 먼저 간 그녀를 떠올리기 힘든 것이 아쉽고 고생만 하다가 간 그녀가 흔적도 없이 너무 허무하게 사라진 것 같아 마음이 아프기도 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는 제니가 여기저기 실패라는 매듭으로 꽉꽉 조여진 자신의 인생까지 닮을까 그것이 더욱 두려웠었다.

환한 웃음을 보이며 가볍게 폴씨의 어깨를 안은 제니에게서 새콤한 레몬 같은 향수 냄새가 났다. 4년제 대학을 안 가면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당하면서 평생 후회할 것이라고 내뱉은 폴씨의 말을 반증이라도 하려는 듯 제니는 여유 있고 밝아 보였다. 어떻게 지냈냐, 몸은 건강하냐, 별다른 일 없냐, 조심스러운 질문이 오간 후에는 그저 음식을 씹고 삼키며 서로 눈치를 보았다. 제니는 얼마 전 캐나다로 다녀온 여행에서 찍은 사진들을 몇 개 보여주고 요가학원에서 강사로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한국어와 영어 단어로 성기게 엮인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마치 코끼리를 만지는 장님 마냥 혼란스러웠다. 모든 일이 잘 되고 있고 아무 걱정도 없고, 정말 그런 삶이 가능한 것인지 아니면 제니가 안에서 곪고 있는 상처를 숨기고 있는 것인지 폴씨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하나하나씩 바람이 빠져 바닥으로 떨어진 풍선 마냥 꿈들을 다 잃어버린 폴씨는 그저 제니가 좁은 이민자의 사회에서 입방아에 오를 일 없이 살고 있었기 만을 바랬다. 남은 면발을 들이키면서 집에 가는 길에 마트에 들러 살 맥주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던 폴씨에게 제니가 문득 커피를 제안했다. 어색한 침묵을 두서없는 말로 메꾸는 것도 스트레스인지라 제니도 어서 헤어지고 싶어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폴씨는 당황하여 “그럼 물론이지.”라고 말한다는 것을 “들어가 봐야 하지 않니?”라고 해버렸다. 제니는 코에 주름을 살짝 잡으며 “아니에요, 아직 시간있어요.”라고 말하고 근처에 아는 커피숍이 있다며 앞장섰다.

“케일라 언니 결혼식 때 왜 안 오셨어요?”

커피가 식을 때 즈음에 제니가 말을 시작했다.

“뭐 바쁘기도 했고. 식당에서 사람들이 결혼식이 굉장했다고 얘기들 많이 하더라. 신문에도 실렸다며. 결혼 기사도 신문에 나는 건지 몰랐다.”

“그건 그냥 신문에 돈 주고 발표하는 거예요. 많이들 그렇게 해요.”


“그래? 뭐 신랑이 아주 대단한 사람이라며. 사람들이 그러던데. 하버드인가 거기 출신이라고.”

“스탠퍼드요. 뭐 한국 사람들에게 차이가 있나요? 명문학교면 다 좋아하지.”

비아냥거리듯 말한 제니는 성급히 말한 것을 후회하듯 입을 다물었다.

“직업이 뭐라고 했더라?”

“소프트웨어 회사 사장이에요. 실리콘 밸리에서.”

“그래? 몇 살이나 됐나.”

“33살인가. 잘 모르겠어요. 그건 안 물어봐서.”

“젊은 친구가 대단한구나. 잘 됐구나.”

“그런 거보다 둘이 굉장히 잘 맞아요. 신랑이 배려도 많고. 벌써 아기 계획을 가지고 있더라구요. 결혼을 빨리하는게 나쁘지 않은 거 같아요.”

제니는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초조하게 두드리며 숨을 몰아쉬듯이 말했다. 테이블 위에 올려진 제니의 손가락 위에 석류알처럼 빨간 알이 박힌 금반지가 문득 보였다.

“그렇지, 잘 맞는 사람이면 빨리 해도 나쁘지 않지. 너네 엄마랑 나도 25살 때 했으니까.”

“저기. 그래서 말인데 드릴 말씀이 있어요.”

제니가 조심스레 시선을 맞추며 말했다. 테이블을 두들기던 손가락들이 머그잔의 손잡이를 손등의 힘줄이 서도록 잡고 있었다.

“저 곧 결혼해요. 2주 후에 식 올릴 거예요.”

폴씨는 잠자코 있었다. 머릿속이 하얘져서 잠시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았다.

“뭐 하는 사람이냐?”

폴씨는 헛기침을 하고 물어봤다.

“사업해요. 헤이즈 밸리에 바를 가지고 있어요.”

술장사를 하는 놈이라. 결국은 그런 놈을 골랐구나 하는 생각이 스쳤다. 조금 전에 들었던 케일라의 번쩍거리는 신랑에 대한 말이 떠올랐고 또 한번 패배감이 느껴졌다.

“몇 살 이냐? 부모는 뭐 하고?”

그의 말투에 차분함의 포장은 벗겨지고 가시가 드러나고 있었다. 제니의 표정이 점점 더 굳어지는 것을 느끼면서도 폴씨는 멈출 수가 없었다. 대학에 가지 않겠다고 말한 제니에게 고함을 지르며 연을 끊어버리겠다고 윽박질렀을 때에도 지금처럼 뜨거운 화가 치밀어 올랐었다. 폴씨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제니의 눈에도 그때와 같은 불꽃이 타닥거리고 있었다.

“이름은 알고 싶지 않으세요? 케빈이에요. 아버지는 보석 세공 업자이시고 어머니는 은퇴하시기 전에 고등학교 선생님이라고 하셨어요. 두 분 다 동부에 사세요. 같이 사시진 않지만. 그리고-”

제니는 입술을 살짝 깨물고 잠시 망설였다.

“좋은 사람이에요. 나한테 정말 잘해주고 친절해요. 나이 차이는 살짝 나지만 굉장히 젊게 살아요. 내가 만났던 또래 남자친구들보다 훨씬 더.”

“나이 차이가 나다니? 몇 살 이나 나는데?”

“He‘s forty-one.” 제니가 고개를 돌리고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마흔한 살?”

폴씨의 목소리가 옆의 사람의 시선을 부를 만큼 커졌다.

“마흔한 살이면 너랑 거의 스무 살 차이가 아니냐.”

“스무 살? 열 여섯 살이죠. 그리고 만나면 알겠지만 절대로 마흔한 살로 안보여요. 운동도 매일 하고.”

“설마 이혼남이냐?”

“그게 나쁜 것처럼 말하는 거 난 이해 못해요. 그리고 아니에요. 아직 결혼한 적 없어요.”

“뭐 이민 온 사람이냐? 아님 여기서 태어났어? 왜 그 나이 될 때까지 결혼을 안 했대?”

“자기 삶을 워낙 열심히 사는 사람이라 하고 싶은 거 다 할 때까지 결혼하고 싶지 않았다고 했어요. 요즘 마흔 넘어서 결혼하는거 흔한 일이에요. 그리고 교포 아니에요. 그 사람 미국 사람이에요. 백인이라고요.”

제니는 폴씨의 반응을 예상하고 있다는 듯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폴씨는 배를 한대 얻어맞은 양 둔한 아픔이 느껴졌다. 그가 일하는 식당에 젊은 동양 여자들과 오는 나이 많은 백인 남자들이 생각났다. 스시바에 앉아서 딸벌인 여자들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고급 사케를 몇 병씩 시키는 그들을 폴씨는 항상 경멸감이 담긴 눈으로 보곤 했었다. 저런 여자들의 부모는 뭐 하는 사람인지 하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었다. 그런데 제니가 그런 남자와 결혼을 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이렇게 됐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돈이 없어서 잘 못 키워서 이렇게 됐다. 얘가 대학을 안 가서.

“결혼식 전에 만나야 하지 않겠어요? 사실 나, 아빠한테 화도 많이 났었고, 화가 조금 풀린 다음에도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생각도 안 났어요. 그런데 이 사람이 설득해서 오늘 만나자고 한 거예요. 정말 생각도 깊은 사람이에요. 줄리 이모에게 물어보세요. 이모가 얼마나 칭찬인데요.”

제니의 이야기에 치밀었던 분노와 답답함이 그의 처형이었던 여자를 향해 물꼬가 트인 댐의 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그래 지 딸은 스탠퍼드인지 뭔지 나온 회사 사장에게 시집보내고 내 딸은 원조교제라도 시키듯 늙은 백인한테 줘버린다는 거냐.

“설마 너네 이모가 소개해준 거냐?”

“아니에요. 그 사람이 하는 바가 제 단골집이어서 그렇게 만나게 됐어요.”

“얼마나 사귀었길래 벌써 결혼이니? 네가 아직 25살도 안됐는데.”

“이제 일년 조금 넘었어요. 일주년 기념일날 청혼 받은 거예요.”

“너 뭐 보니까 새 차를 타고 왔던데 그 차도 그 남자가 사준거냐?”

“갑자기 무슨 소리예요. 내 차, 내가 리스한 거예요.”

빠르게 쏘아붙이기 시작한 제니의 말의 중간중간에 어물거림이 있었다.

“다 내 잘못이다. 내가 뒷바라지도 못해주고 그래서 그렇지. 네가 뭐라고 해도 어떻게든 대학은 보냈어야 했는데.”

폴씨는 눈시울마저 빨개지며 말을 흐렸다.

“어떻게 결혼한다는 딸에게 축하는 못하고 그렇게 말해요? 내가 뭐 대학 안 가서 못난 사람이라도 만났다는 거예요? 이 사람 본 적도 없으면서 왜 그렇게 말해요?”

“미안하다. 내가 무슨 말을 할 자격이 있겠냐. 너 마음대로 해라.”

“결혼식에는 오실 거예요?”

“모르겠다.”

“진심이세요?”

“생각을 좀 해봐야겠다. 먼저 일어나마.”

집에 돌아온 폴씨는 바로 전기장판을 펴고 누웠다. 졸음이 몰려왔다. 그는 그저 계속 자고 싶었다. 깨어났을 때는 해가 져 있었고 그의 방은 껌껌했다. 그는 어둠을 헤치고 일어나 부엌으로 가서 물을 마시고 의자에 앉았다. 몇 시간 전의 제니와의 만남이 너무도 먼 과거의 일처럼 느껴져 실제로 있던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배가 고팠지만 무언가를 먹어야 한다는 것이 귀찮았다. 창문 밖의 가로등을 감싼 안개를 물들인 주황색 빛에 의지하여 냄비를 찾고 물을 올렸다. 어둠 속에서 후루룩 라면을 먹던 그는 문득 옛날 생각이 났다. 제니가 고등학교 11학년 때의 일이었다. 학교 행사다 운동경기다 학원이다 해서 항상 바쁘던 제니는 다니던 학교 근처에 있던 박여사네 집에서 자고 오는 일이 많았었다. 밤 12시가 돼야 일이 끝났던 폴씨는 제니의 얼굴보다 침대 위의 검은 실루엣을 보는 일이 많았었고 어떤 때는 일주일 동안 한 번도 서로 보지 못하는 때도 있었다. 그날은 폴씨 마음이 유독 아픈 날이었다. 같이 일하면서 정이 들고 사랑하게 된 웨이트리스 아가씨와 이별을 하고 죽은 아내의 재를 뿌린 곳에 찾아가 반년을 못 채운 새 사랑에 대해서 털어놓고 술을 거하게 마신 날이었다. 아가씨라고는 하지만 서른을 넘은 그녀는 결혼을 원했었다. 말 많은 이민자 사회에서 같이 일하던 젊은 여자와 눈이 맞았다는 추문이라도 퍼져 제니가 알게 될까 봐 전전긍긍하던 그였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유학생에서 불법체류자까지 낙오됐던 그녀는 어떻게 해서든 미국에서 정착을 하기 위해 세 군데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악바리처럼 살고 있었다. 하지만 신분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기는 커녕 혹시나 누가 볼까 제대로 된 데이트도 못 시켜줬던 그의 곁에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머물다가, 결국 한국에 있는 어머니가 병이 나셨다고 “다시는 못 보겠네요.” 하고 가버렸던 것이었다. 마신 술을 다 토해내고 허기에 라면을 끓여 먹고 있을 때였다. 그날도 이모네 집에서 자고 올 줄 알았던 제니가 열쇠로 문을 따는 소리가 들렸다. 술이 걸쭉하게 오른 폴씨는 “우리 딸 왔어?” 하며 평소에는 쓰지도 않던 말로 제니를 반겼다.

“뭐해요?” 부엌 문 칸에 선 채로 제니가 물었다.

“뭐하긴, 라면 먹지.”

“왜 불도 안 켜고 그러고 먹고 있어요?”

“아빠가 너무 배가 고파서 깜빡 잊은 모양이다.”

“누가 배가 고프다고 불도 안 켜고 밥을 먹어요? 무슨 동물도 아니고. 왜 그래요 진짜 구질구질하게.”

갑작스럽게 눈물까지 보이며 화를 내는 제니의 말투에서 폴씨는 자기속에서 끓어오르는 독한 억울함을 느꼈다. 폴씨가 왜 내 인생은 이 모양 이 꼴이냐 하고 한탄할 때처럼, 왜 당신 같은 사람이 내 아버지여야 하느냐고 묻는 근본적인 분노인 듯했다. 높은 천장, 우아한 가구들, 집 안의 냄새마저 고급스러운 박여사의 집에서 공주같이 누리면서 자란 케일라와 자기 자신을 비교하며 상대적 박탈감을 느꼈었을지도 모르지만 폴씨는 거기까진 생각이 닿지 않았었다. 오히려 박여사의 식당에서 일하면서 겪는 서러움, 인생을 통째로 낭비한 듯한 분함,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에게 애정도 안 보이는 딸이라는 존재 때문에 사랑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차버렸다는 한탄에 폴씨는 먹던 라면을 엎어버리고 소리를 질렀었다.

내가 너를 키우느라 뭘 포기했어야 하는지 알기나 해?

내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사는데.

너만 아니었으면-

자식위해 산다고?

과거 생각에 자신도 모르게 주먹까지 불끈 쥔 폴씨는 그릇에 젓가락을 던지듯 내려놓았다. 이것만 아니었으면, 저것만 달리했으면, 눈앞에 마땅히 떠오르지도 않는 가상 속의 삶을 갈망하며 눈앞에 펼쳐진 현실에 욕설을 내 뱉았다. 쉰을 바라보는 나이에 아내의 죽음 후 남처럼 지내는 처형의 식당에 생계를 의지하고 있다는 것이 치욕스러웠다. 10시간이 넘게 매일 서서 하는 일에 하지 정맥류, 근육통, 치질 등 나날이 늘어가는 병고에 고통스러워하며 후회와 지루함으로 얼마 남지 않은 나날들을 갉아먹고 있는 자신이 불쌍했다. 하나뿐인 딸이라도 번듯한 대학에 가고 취직해서 좋은 남자와 사는 것을 보는 것조차 나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꿈일 뿐인가. 아무리 변변치 않은 놈이라도 마흔 먹은 백인보단 날 성싶었다. 가라오케나 룸살롱에서 딸이 일한다는 것을 알면 이런 기분일까 싶기도 하였다. 다 내가 모질라서 이리 됐지. 돈 때문에 그런 놈을 만나는 것이 뻔하다고 생각했다. 다른 이유가 무엇이 있겠냐 하였다. 내가 돈만 있고 능력만 됐으면 그 이모라는 여자한테 기대는 일은 없었을 텐데. 돈만 아는 독한 그 여자와 가깝게 지내면서 물질적인 속물이 되어버린 것이 틀림없는 것 같았다. 어쩌면 그래서 예전에 대학을 안 가겠다는 결심을 한 것이 아닌가 하니 묵혀온 화가 치밀어 올랐다. 25년이 다 돼가는 지금도 폴씨는 제니의 이모, 박여사를 처음 봤던 날이 생생했다. 제대하자마자 임신한 여자친구와 결혼한 폴씨는 삶의 밑천으로 삼으려고 했던 가게가 IMF라는 토네이도에 쓸려 날아가 버린 후 도무지 취직자리를 찾을 수 없었다. 친언니가 미국에서 잘 살고 있는데 우리가 가면 일자리도 주고 도와줄 것이라는 아내의 말에 미국에 덜컥 와버렸던 것이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가게를 2개나 한다는 처형이 결혼하면서 중단해야만 했던 공부를 다시 할 수 있게 도와줄까 은근히 기대를 하기도 했었다. 새벽 비행기로 도착해 택시에서 기절한 듯이 잠이 들은 아내를 침대로 옮기고 처음 만난 처형을 따라 자욱한 안개가 내려앉은 뒷마당으로 나갔다. 어릴 때부터 아내와 쌍둥이로 자주 오해를 받았다는 처형은 아내를 꼭 닮은 귀여운 얼굴을 하고서는 냉정한 말투로 자신은 처음부터 동생의 결혼은 반대였을 뿐 아니라 지금도 사실 간신히 받아들였을 뿐이라고 했다. 그리고 여기서 살고 싶으면 일부터 시작하라고, 지붕, 빨래, 주방 일 중 하나를 고르라고 했었다. 박여사가 피는 얇은 버지니아 슬림이 수북이 쌓인 재떨이에 애꿎은 담뱃재만 털던 폴씨는 다 타 들어간 담배보다 더 쉽게 부서진 듯한 꿈을 머릿속에서 털어내며 지붕 일을 선택했었다. 몇 년이 지난 후에도 폴씨는 가끔씩 그때의 꿈을 꾸고는 목을 조르는 밧줄에서 간신히 벗어난 사람처럼 숨을 헉헉거리고는 했다. 하지만 그렇게 자신의 인생의 문을 닫아버리고 대신 열은 창문은 죽은 아내에게도, 하고 싶은 일이 없다고 고개를 갸우뚱하는 제니에게도 쓰이지 못하고 거미줄과 먼지만 쌓이는 것 같아 견딜 수가 없었다. 잔을 씻기도 귀찮아 병나발을 불던 소주를 다 마신 폴씨는 눈물만 참았지 속으로는 주저앉아 꺼이꺼이 울고 싶었다.

제니의 결혼식이 삼일 안으로 다가온 목요일이었다. 식당은 몹시도 바빴다. 주류 메뉴를 바꾼 후부터 음식보다 술을 찾는 손님들이 늘어나 10시가 넘은 시간에도 스시바는 웅성거렸다. 11시가 지나고 드디어 허리를 펼 여유가 조금 생겼을 때 입구에 달린 벨이 떨어져라 문을 세게 밀치며 청년 세 명이 들어왔다. 그들은 앉자마자 메뉴에서 두 번째로 비싼 준마이 다이긴죠와 사시미 보트를 주문했다.

“사시미 보트는 좀 힘들 것 같은데. 음식은 벌써 라스트 콜이 끝나서.”

“아저씨, 좀 해주세요. 여기 내 친구, 오늘 바 시험 합격했어요. 이제 변호사 될 꺼에요, 변호사.” 서투른 한국말로 조르는 청년에게 라스트 콜이 끝나면 주문을 못 받는다고 하려 했지만 어느새 박여사가 슬쩍 뒤에서 다가와 남자들이 시킨 사케가 200불 짜리라고 속삭이며 음식 주문을 받으라고 명했다.

“콩글래츄래이션.” 폴씨는 씻어서 말려놓은 생선회 칼을 꺼내며 힘없이 말했다.

“Have one on me.” 바 시험을 합격했다는 백인 청년이 폴씨에게 잔을 건네더니 사케를 따라주었다. 식당에 있는 여자들을 흘낏거리던 청년들의 대화는 곧 그들의 시선을 따라 여자에 관한 이야기로 옮겨져 왔다. 살짝 달아오른 뺨을 제외하고는 머리와 피부, 그리고 눈동자까지 창백한 백인 청년은 술잔을 치켜들더니 “I love Korean girls. They are so beautiful. Cheers!” 하고 외쳤다. 식당에 있던 몇몇 여자들이 입을 가리고 킥킥거렸고 대담한 몇 명은 자신의 잔을 같이 올리며 “Hell yeah!” 하고 외쳤다. 어색하게 같이 건배를 한 폴씨의 눈에 문 쪽에서 커다란 쇼핑백을 들고 박여사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제니가 들어왔다. 어디서 술을 먹고 왔는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엉덩이와 다리의 선이 드러나는 딱 달라붙는 요가 바지와 팔을 들 때마다 배를 조금씩 드러내는 짧은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박여사와의 이야기를 마치고 자신을 향해서 걸어오는 제니에게 쏠린 남자들의 시선을 느낀 폴씨는 서둘러 만들던 롤을 끝내고 장갑을 벗고 스시바 밖으로 나갔다.

“이 시간에 여긴 왜 왔니?”

“아빠한테 이거 주려고 왔어요.” 제니가 시선을 떨군 채 들고 있던 쇼핑백을 들이밀었다. 술을 마신 것을 숨기려 껌을 씹었는지 입에서 민트 냄새가 확 풍겨왔다.

“이게 뭐니?”

“양복이에요. 결혼식 오실 때 입으시라고.”

“양복 있는데 뭣하러 이런 걸 또 돈 주고 샀어?”

“무슨 양복? 초등학교 때 나 학교 연극 때 입고 왔던 그거?”

“아니, 내가 양복 입을 일이 얼마나 있다고 이걸 사. 혹시 환불할 수 있니?”

“제 선물이에요, 선물. 내 선물을 환불하시게요? 환불 안돼요.”

“아니다, 알았다 아무튼.”

“결혼식 올 거죠?”

호기심 반 색정 반 단추같이 맨들 거리는 눈으로 제니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청년들 때문에라도 어서 대화를 끝내고 싶었다.

“내일 얘기하자꾸나.”

“오늘 알아야겠어요. 손잡고 식장 걷고 이런 거 안해도 돼요. 어차피 굉장히 간단하게 하기로 했어요. 그런데다가 돈 쓰기 싫어서. 그니까 그냥 와서 손님처럼 앉아만 있으면 돼요.”

“그래 알았다. 가마. 이제 가봐라. 시간이 이렇게 늦었는데. 택시 불러서 가, 뮤니 타지 말고. 바람이 찬데 옷이 그게 뭐니.”

“그럼 꼭 와야 돼요. 약속했어요. 갈게요.”

제니는 컴퓨터 옆 테이블에 앉아서 돈 계산을 하고 있는 박여사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오랫동안 껴안더니 처음 배를 타는 선원처럼 불안한 발걸음으로 가게에서 나갔다.

“아저씨 딸이세요?”

제니가 문을 밀치고 나가는 것을 볼 때까지 그녀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않던 청년이 물었다. 폴씨는 마치 질문을 못 알아들은 마냥 미세할 정도로 고개를 끄덕이고 생강이나 더 필요한 것이 없냐고 급히 말을 돌렸다.

“예뻐요. 좋으시겠어요. Dude, that was his daughter.”

“아 뭐. 딴 거 필요한 거 있으신가? 이제 계산서 나가야 하는데.”

“여기 친구가 따님이 너무 예쁘대요. 남자친구 있어요?”

“음, 이제 곧 결혼을 하는데…”

“아쉽다. 이 친구 진짜 괜찮은데. 착하고 돈도 많고 이제 변호사도 될 건데. 그 결혼하는 남자는 무슨 일해요? 변호사보다 더 좋아요?”

얻어 마신 사케 두 잔에 피로 때문인지 벌써 취기가 살짝 도는 폴씨는 주방 쪽에서 버스보이에게 잔소리를 하고 있는 박여사의 눈치를 살짝 본 후 그의 사위가 될 사람은 의사라고 해버렸다. 스탠퍼드에서 둘이 같이 공부를 했다고. 스탠퍼드라는 단어가 마치 고급 음식처럼 입에 감기는 감촉이 좋았다. 청년들은 감탄사를 내뱉고 폴씨를 축하해줬다. 술이 많이 취한 듯한 한 청년은 미국에 이민 와서 리커스토어, 세탁소 등에서 일하며 자신을 길러준 부모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하며 분위기를 숙연하게 만들었다.

“정말 대단하세요. 진짜 우리 부모님들 아메리칸드림은 우리 자식들이 가지는 거 같아요.” 갑작스러운 부모 생각에 코끝까지 빨개진 청년이 엄숙히 말하더니 폴씨에게 술을 한 잔 더 권했다. 폴씨는 허허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술을 받고 청년에게 효도를 하라고 했다. 그래, 원래 이렇게 됐어야 하는데. 손님들이 모두 떠난 후 불을 하나만 남기고 다 꺼버린 어두운 식당 안에서 폴씨는 거짓을 통해 잠시 맛보았던 뿌듯함을 안주 삼아 곱씹으며 식어버린 핫사케를 내리 들이켰다.

제니의 결혼식 날 아침 아우터 선셋에서는 금세 비라도 쏟아질 듯 우중충했던 하늘은 샌프란시스코 다운타운을 지나면서 점점 하늘색을 띠더니 오클랜드로 건너가는 바트 안에서는 눈이 아플 정도로 파랗게 빛났다. 남의 옷을 빌려 입은 듯 어색하게 느껴지는 새 양복이 혹시나 구겨질까 의자 끝머리에 걸터앉은 폴씨는 반대편에서 태평하게 손톱을 깎고 있는 중국인 할머니를 멍하니 바라보며 머릿속으로 몇 번씩이나 제니의 남자친구와의 대면을 그리고 있었다. 폴씨는 마치 영화에서처럼 “이 결혼에 반대한다!” 하고 외치는 자신의 모습과 그런 그를 입을 떡 벌리고 바라보는 제니의 남자친구를 상상했다. 마흔한 살이라고 들었지만 폴씨의 머릿속의 남자는 흰머리가 희끗희끗하고 위에서 보면 발가락이 안 보일 정도로 배가 나오고 얼굴이 알코올중독자 마냥 벌건 백인 남자였다. 오클랜드에 있는 어떤 아트 갤러리를 빌려서 결혼식을 한다는 것도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얼마나 짠돌이면 멀쩡한 웨딩홀이나 교회를 놔두고 갤러리를 빌려서 결혼을 한다는 것인지. 아트 갤러리라고는 처음 이민을 왔을 때 제니 엄마의 손을 잡고 산책하던 피셔맨스 와프 근처에서 몇 번 두리번거린 것이 전부인 폴씨는 어떤 결혼식이 될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지만 이 결혼식이 끝을 못 보도록 하겠다는 굳은 의지를 마음속으로 수없이 다지고 있었다.

공장을 개조한 듯한 낡은 벽돌 건물들이 즐비한 오클랜드 업타운에 도착한 폴씨는 정말 이런 곳에서 결혼을 한다는 것인가 청첩장에 적힌 주소를 의심했다. 한창 떠오르고 있는 오클랜드 다운타운에서도 특히 인기가 많아서 녹이 슬고 낡은 건물의 겉모습은 오히려 멋을 위해 남겨놓고 안쪽을 모던하게 리모델한 유기농 음식점과 바, 아트 갤러리, 패션 스토어 등이 하루가 다르게 늘고 있는 소위 말하는 힙한 동네라는 것을 폴씨가 알 턱이 없었다. 주소에 적힌 갤러리가 있는 골목에 도착한 폴씨는 갤러리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들러리들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을 돌렸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숨이 턱턱 막혀왔다. 바트역 쪽으로 다시 급히 걸어간 폴씨는 눈에 바로 들어온 바에 들어가 평생 몇 번 마셔 보지도 않은 위스키를 시켰다. 맥주나 와인으로는 채워지지 않을 것 같은 목마름 때문이었다. 어떤 위스키를 원하냐는 바텐더에 질문에 아무거나 센 것을 달라고 했다. 아직도 여름의 열기 가 안 가신 날씨에도 불구하고 몸에 딱 달라붙는 셔츠에 나비넥타이, 그리고 조끼까지 차려입은 젊은 바텐더는 입 위로 길게 곡선을 그린 콧수염을 따라 입술이 휘어지도록 싱긋 웃더니 큼직한 온더록스 잔에 꿀처럼 매끄러운 갈색의 위스키를 따르고 유리구슬처럼 둥그런 얼음을 한 조각 넣어주었다. 보기와는 달리 매캐한 맛이 나는 위스키가 혈관을 따라 몸에 퍼지면서 용기가 조금 나는 것 같기도 했다. 같은 것을 한 잔 더 달라고 했다. 바텐더는 폴씨의 양복을 칭찬하고 무슨 특별한 날이냐고 물었다.

“스페샬? 노. 노. 노 스페샬.”

시간을 보니 어느새 20분이 지나 있었다. 허둥지둥 계산서를 달라고 하니 무려 30불이 나와있었다. 사기를 당한 듯해 화가 치밀었지만 결혼식이 끝나기 전에 빨리 가야만 했다. 바 옆 델리의 유리문에 붙은 담배 포스터 바로 위에 붙여놓은 비흡연 홍보 광고는 흡연으로 손가락을 잘라야 했다는 사람의 사연과 사진을 소개하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술이 취해도 혼자서 토론을 하다가 결국 포기했을 텐데, 위스키는 생각이 머릿속에 완전히 자리를 잡기도 전에 행동으로 옮기게 하는 힘이 있는 듯했다. 바로 지금 폴씨에게 필요한 것이었다. 말보로를 한 갑을 사서 잔돈을 받기도 전에 비닐을 찢고 입에 물었다. 두 달 만에 입에 문 담배의 필터는 기억보다 더 단단했다. 아우터 선셋처럼 바람이 부는 것도 아닌데 다섯 번 째에 간신히 성냥을 켜고 불을 붙였다. 입 안을 가득 채운 담배연기의 맛이 역겨웠다. 담배가 피우고 싶을 때마다 입에서 맴돌던 그 맛이 아니었다. 머리가 핑 돌며 어지럽기도 했다. 참아야지. 이렇게 두 세 까치 피다 보면 금새 또 맛있게 느껴질 것이 아닌가. 니코틴에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손이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필터를 잡고 있는 손가락이 뜨거울 때까지 담배를 못 버리던 폴씨는 마침내 마음을 다잡은 듯 담배꽁초를 벽에 비벼 끄고 갤러리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갤러리 안은 조용했다. 전화를 하러 잠깐 나온 듯한 중년의 백인 여성이 결혼식은 위층이라며 손짓으로 안내를 해주었다. 어느새 노곤해진 햇볕이 세모난 지붕 아래 큼직한 창문을 통해 들어와 나무바닥과 하얀 벽에 반사되며 식이 한창 진행 중인 공간을 건조기에서 막 꺼낸 빨래처럼 기분 좋은 따스함으로 채우고 있었다. 주례사가 무엇인가 재치 있는 말을 했는지 30명 정도로 보이는 하객들의 어깨가 기분 좋게 흔들리며 웃음소리가 여기저기서 새어 나왔다. 폴씨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고 고개를 들어 빛이 들어오는 창문을 향해 서있는 신랑 신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면사포는 하지 않고 깔끔하게 틀어올린 머리에 꽃이 달린 비녀 같은 것을 꽂고 물결처럼 굽이굽이 떨어지는 민트색드레스를 입은 제니의 뒤태는 발레리나처럼 꼿꼿했다. 폴씨의 시선이 신랑에게로 옮겨갔다. 제니보다 머리 하나 정도 키가 크고 잿빛 갈색 머리를 가졌다는 것 밖에 알 수 없었다. 낯선 남자의 팔 위에 올려진 제니의 건강하게 그을린 긴 갈색 팔을 바라보는 폴씨의 머릿속에서는 아기 때의 하얗고 토실토실하던 제니와 우리 찹쌀떡하고 부르면서 깨무는 시늉을 했던 아내가 떠올랐다. 목욕물에서 반짝이던 제니의 짧고 통통한 팔다리, 그리고 그가 조심스럽게 작은 머리를 젖히고 물을 부으면 눈을 한껏 찌푸리다가 다 끝났다는 말에 꺄르르 웃던 소리도 문득 생각났다. 주례사의 말에 웃다가 신랑을 한 번 바라본 후 뒤를 흘낏 쳐다본 제니의 눈과 폴씨의 눈이 잠시 만났다. 눈 아래 살짝 주름이 잡히도록 웃고있는 제니의 눈에 슬픔이 있었다. 마치 따뜻한 집 안에서 저녁을 먹다가 추운 밖에서 자신들을 부럽다는 듯이 바라보는 성냥팔이 소녀와 눈이 마주친 어린 아이와 같은 눈빛이었다. 자신의 빈 손의 공백이 갑자기 너무나도 크게 느껴진 폴씨는 차마 뺄 수 없어서 그대로 두었다가 이제는 손가락에 박힌 듯한 결혼반지를 만지며 깍지를 힘껏 주었다.

코미디언처럼 쉬지 않고 농담을 이어가는 주례사의 말에 배를 잡고 웃는 사람들의 뒤 편에서 깍지를 낀 손으로 홀로 서서 눈물만 흘리던 폴씨는 신랑과 신부의 키스가 있겠다는 말에 뒤돌아섰다. 눈 안에 넘실거리는 햇빛을 흘려보내며 거리로 향하는 폴씨의 뒤에서 박수소리와 함께 휘파람 소리가 바람을 타고 전해져왔다. “신혼 여행에서 다녀오면 한 번 연락을 해야지.” 폴씨가 스스로에게 말했다. 뜻하지 않게 이틀이나 쉬게 된 이번 주에 선물이나 사러 가야겠다고 다짐을 하며 바트역으러 절뚝거리며 다가가는 폴씨는 오랜만에 원없이 흘린 눈물때문인지 앞이 조금 더 선명히 보이는 듯 했다.

당선 소감

가장 하고 싶은 일도, 가장 어려운 일도 글을 쓰는 것인 저에게 용기를 준 당선입니다. 소중한 시간을 내어 읽어 주신 심사위원 윤성희 작가님과 은희경 작가님, 그리고 이런 기회를 주신 한국일보 관계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2017 미주한국일보 문예공모전 단편소설 당선작] ‘그 아버지의 딸’ 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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