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과학이 만들어낸 괴물

2017-08-12 (토) 권정희 논설위원
작게 크게
“핵무기 개발로 인간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단 한방에 전 인류문명을 파괴할 수 있는 기술을 얻었다.”

미국이 주도한 원자폭탄 개발프로그램,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물리학자 요세프 로트블라트의 경고였다. 2차 대전 중이던 당시 세계의 물리학자들은 독일의 원자폭탄 제조 가능성 앞에서 하나로 뭉쳤다. 히틀러가 원자탄을 손에 넣는 최악의 사태만은 막아야 하겠기에, 그래서 독일 보다 먼저 개발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사상 첫 핵무기 개발은 시작되었다. 나치에 대한 증오 그리고 과학자로서의 학문적 호기심과 연구 열정이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1944년 후반부터 과학자들은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미국 첩보대가 독일에 잠입해 입수한 비밀문건을 확인한 결과, 독일은 원자폭탄을 만들지 못하고 있었다. 1945년 5월 독일이 항복할 때까지, 맨해튼 프로젝트 역시 폭탄을 완성하지 못했다.

과학자들은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독일이 원폭을 만들지 못한 상황에 폭탄제조를 계속해야 하는가, 이로 인해 어떤 재앙이 닥칠지 알 수가 없다”는 우려가 깊었다. 그럼에도 양심상 원폭 제조를 계속할 수는 없다며 맨해튼 프로젝트를 떠난 과학자는 로트블라트가 유일했다.

폴란드 태생 영국인이었던 그는 “과학자들이여, 인류에 대한 책임을 기억하라”며 평생 핵무기 반대운동에 앞장섰다. 과학은 인류의 안녕과 복지에 기여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살았던 그는 1995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2017년이 이렇게 시끄러울 줄은 몰랐다.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반이민, 오바마케어 폐지, 러시아 대선개입 스캔들 등 국내 이슈로 조용할 날이 없더니 김정은이 가세하면서 지구 전체가 시끌시끌해졌다. 자기애성 자아 도취자로 쌍벽을 이루는 트럼프와 김정은이 예측불허의 막무가내 언행을 쏟아내면서 세계는, 미국은, 특히 한반도는 롤러코스터를 탄 듯 어지럽다.

그들이 불같이 쏟아내는 ‘화염과 분노’ ‘불바다’는 다른 말로 핵전쟁. 로트블라트의 말을 인용하자면 ‘단 한방에 전 인류문명을 파괴할 수 있는’ 가공할 괴물, 핵무기가 너무도 위험한 사람들의 손에 들어가 있다.

만약 로트블라트 같이 단호한 과학자가 좀 더 많았더라면 원폭은 세상에 나오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까? 가능성은 낮다. 그 즈음 원자폭탄은 이미 과학의 영역을 벗어나 정치 영역으로 넘어가 있었다. 소련을 앞질러야겠다는 경쟁심, 미국의 막강한 힘을 과시함으로써 초강의 위치를 차지하겠다는 욕심이 작용했다. 해리 트루먼 당시 대통령은 1945년 7월 인류 최초의 핵실험을 명령했고, 8월 인류 최초의 원폭투하를 결정했다.

8월6일 히로시마 폭격으로 7만5,000명이 즉사하고, 12월 말까지 14만명, 1950년까지 총 20만 명이 사망했다. 사흘 후 나가사키 폭격으로 4만 명이 즉사하고, 1950년까지 총 14만 명이 사망했다.


상상을 초월하는 파괴력에 관련 과학자들은 “우리가 괴물을 만들었다”며 후회했다. 맨해튼 프로젝트의 수장으로 ‘원자폭탄의 아버지’로 불리는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내가 세계를 파멸시키는 죽음의 사자가 되었다”며 괴로워했다. 그럼에도 소련을 비롯한 열강은 군사적 우위를 차지하기 위한 핵개발 경쟁에 돌입했고, 핵확산 금지조약으로 통제가 되는 듯했지만 핵을 유일한 생존책으로 여기는 북한을 막아내지는 못했다.

핵이 무서운 것은 피해가 시공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방사능 낙진이 얼마나 멀리 날아가 얼마나 오래 남아있을지 아무도 알 수가 없다.

20세기 핵개발 경쟁은 엉뚱한 희생자들을 만들어냈다. 열강이 멀리 남태평양으로 가서 핵실험을 했기 때문이다. 가장 대표적인 곳이 마셜군도의 비키니 환초. 종전 후 마셜군도를 신탁통치하게 된 미국은 이곳을 핵 실험장으로 이용했다. 주민들을 강제이주 시키고 1946년부터 12년 간 비키니 환초에서만 23차례 등 총 67차례의 핵실험을 했다.

그 땅이 온전할 리가 없다. 70년이 더 지난 지금도 비키니 환초에는 사람이 살 수가 없다. 방사능 수치가 너무 높기 때문이다. 핵실험 이후 마셜 군도에서는 이상한 일들이 일어났다. 주민들이 원인 모를 병에 걸려 죽고, 바다에는 기형의 물고기들이 나타났다.

주민들을 가장 고통스럽게 한 것은 기형아 출산. 머리 둘 달린 아기, 발가락이 세 개인 아기, 무릎 없는 아기, 팔 없는 아기들이 태어났다. 사람이라기보다는 괴물이 태어나기도 했다. 대표적인 것이 ‘해파리 아기’. 장기가 보일만큼 투명한 피부에 뼈 없이 흐물흐물한 상태로 태어나 하루 이틀 후 숨졌다. 비키니 환초는 말 그대로 재앙의 땅이 되었다.

전쟁이 터진다 해도 거기(한국)서 터지고, 거기 사람들이 죽을 뿐이라는 것이 트럼프의 시각이다. 비키니 환초의 일이 한국의 우리 가족들의 일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과학이 만들어낸 이 엄청난 괴물이 살아서 작동하는 일은 없어야 하겠다.

<권정희 논설위원>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