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다시 듣는 루시 몽고메리의 목소리

2017-08-05 (토) 김영수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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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에서 제일 긴 다리, 컨페더레이션 다리(Confederation Bridge)를 건넌다. 캐나다 동쪽 끝에 있는 가장 작은 주 PEI(Prince Edward Island)와 뉴 브런스윅(New Brunswick) 주를 잇는 다리로, 교각수가 400개이고 길이가 무려 12.9km에 이른다.

이 다리를 건너 프린스 에드워드 섬(PEI)에 들어가면 바닷물을 제외하고는 온통 붉은색이라는 게 인상적이다. 바다 근처의 흙은 특히 빨갛게 보인다. 붉은 모래와 붉은 진흙 위로 잔물결이 이는 해변을 걸으면 물색도 빨갛게 보인다.


초록 나무를 양 옆으로 거느린 붉은 흙길을 걸으면 포근함에 취하고, 붉은 모래 해변을 걸으면 발바닥이 붉게 물들 것만 같다. 붉은 사암 절벽과 파란 하늘색의 대비에 눈이 부시다가도, 푸른 파도에 우뚝 선 핏빛 바위에 놀라 서늘해진다.

PEI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 루시 몽고메리가 <빨간 머리 앤>을 쓸 때, 앤의 머리색을 빨갛게 하려는 발상을 흙빛에서 얻은 게 아닐까 짐작해 본다.

이 섬의 에이번리 마을에 가면 우리에게 <빨간 머리 앤>으로 잘 알려진 <그린 게이블즈의 앤>(Anne of Green Gables)을 만날 수 있다. 초록과 하얀색으로 지은 나무집에 들어서면 주근깨투성이인 앤이 폴짝거리며 튀어나올 것 같고 겉으로 애정 표현을 하지 않으면서도 속 깊은 정을 주던 마릴라 아줌마가 앉아 옷을 수선하고 있을 것만 같다.

앤의 방은 아담하다. 작은 침대 하나가 겨우 들어가는 방에 파란색 커튼이 햇살에 살랑거리는 분위기가 청량하다. 앤이 신던 신발이 의자 밑에 놓여있고 침대에는 원피스가 곱게 개켜져 있다. 저 원피스에 저 신발을 신고 뛰어다녔다지. 의자 위의 책 한 권, 잠들기 전에 읽었을 것 같은 책이다. 장래의 작가는 어린 시절 어떤 책을 읽었을까.

<빨간 머리 앤> 뮤지컬을 보는 동안, 가물거리던 책 내용이 어렴풋이 살아났다. 재미보다는 가슴 뭉클한 감동. 어렸을 때 읽던 말괄량이 앤이 아닌, 마릴라 아줌마에게 사랑이 무엇인지 가르쳐 준 따뜻한 아이로 다가왔다. 그들이 이제는 전 세계에서 찾아오는 방문객들에게 사랑을 전하고 있다. 1985년에 드라마로 제작된 이래 2016년에 리메이크되어 방영 중이라니 고전이 될 법도 한 명작이다.

15개국의 언어로 번역된 <빨간 머리 앤>으로 전 세계인에게 사랑받는 작가 몽고메리가 발그레한 톤으로 조용조용 이야기하는 작은 섬. 앤과 마릴라 아줌마의 가슴 뭉클한 사랑 이야기는 오늘도 그렇게 책으로 음악으로 30년이 넘도록 그림 같은 아름다운 섬에 잔잔히 퍼지고 있다.

작가는 단순히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 깊이 생각하며 삶을 열정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단편으로 떠도는 생각들을 모아 한 편의 글로 엮으려면 일상의 작은 풍경과 하찮은 사건 하나조차도 애정 어린 시선으로 들여다볼 줄 알아야 한다. 창작은 열정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작가의 고독한 작업이 이루어지던 시간을 언어로 교감하는 독자, 작품을 통해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것으로 작가와 독자 사이에는 순환의 연결고리가 형성된다.

자신이 태어나 조부모와 함께 생활하던 작은 섬에 대한 사랑과 열정이 <그린 게이블즈의 앤>이라는 명작을 탄생하게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아직도 수많은 독자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그곳을 찾게 만드는 비결일 것이다.

내가 그곳을 찾은 날은 주위의 빨간 흙 때문인지 하늘이 더 파랗게 보였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왔다. 둘러보니 광활한 대지와 망망대해뿐이었다. 끝없이 텅 빈 듯한 저 붉은 땅과 대양이 실은 생명으로 들끓고 있다고, 지나가는 바람이 알려주는 것 같았다. 바람의 말에 생명을 불어넣으면 이야기가 되고 글이 되는 게 아닐까,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숲길을 걸을 때에도 무엇인가 전하려는 듯한 바람을 다시 만났다. 먼 옛적 마차를 끌고 가는 말발굽 소리와 두런거리는 마을 주민들의 목소리를 바람의 몸에서 듣는다.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보이는 세상을 끌어내는 것, 보이는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세계를 노래하는 것, 그것이 문학인지 모른다. 왜 사느냐를 묻는 게 철학이라면 어떻게 사느냐를 함께 생각하는 것이 문학일 것이다. 이상(理想)으로 존재하는 세계와 실재하는 세계를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하는 것도 문학의 몫이 아닐까 싶다. 이곳을 여행하는 내내, 바람이 비워낸 곳을 문학이 채워준다는 느낌을 받는다. 언제쯤이면 바람이 전하는 말을 문학적 언어로 온전히 표현할 수 있을까.

<김영수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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