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박왕자와 웜비어

2017-06-22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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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6월 13일 경기도 양주군 한 지방 도로에서 교통 사고가 일어났다. 갓길을 걷던 중학교 2년 생 신효순과 심미선 양이 훈련중이던 미군 장갑차에 치어 사망한 것이다. 한국의 시민 단체와 재야 인사들은 즉각 들고 일어나 미군의 만행을 규탄하고 두 소녀의 장례식을 대대적으로 치렀다. 북한은 이들 두 소녀를 모란봉 제1중학교에 등록하고 명예졸업장까지 줬다.

당시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사과하고 각 1억9,000만원의 배상금을 전달했으나 시민 단체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다. 이 사건은 일부 한국인들의 반미 감정을 촉발시켜 그 해 열린 대선에서 노무현이 당선되는데 일조했다.


이들은 지난 13일에도 경기도 양주에서 이들 사망 15주기 추모 행사를 성대하게 열었다. 이 추모제를 주최한 미선 효순 추모비 건립 위원회는 이들이 사망한 도로 앞에 평화 공원을 조성하기로 하고 최근 부지 매입 계약까지 마쳤다. 이날 광화문에서도 분향소가 운영되고 추모 문화제가 진행됐다. 교통 사고로 사망한 사람이 이처럼 뜨거운 추모 열기에 휩싸인 경우는 인류 역사상 드물 것이다.

2008년 7월 11일에는 금강산 관광을 하던 박왕자씨가 북한군의 총격을 받고 숨졌다. 시신을 부검한 의료진은 인민군 초병이 무방비 상태의 민간인을 등뒤에서 조준 사격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 후 1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 북한은 진상 규명도, 재발 방지 약속도, 배상도 아무 것도 하지 않은채 오히려 사건의 책임을 남한 당국에 돌리며 거꾸로 사과를 요구하고 있다.

지금 한국 어디에도 박왕자를 추모하는 행사는 열리지 않고 기념 공원도 물론 없다. 한쪽은 북한의 위협을 저지하느라 애쓰다 과실로 죽게 했고 다른 한쪽은 6.25로 수백만 한국인을 죽이고 그 후로 숱한 테러와 만행을 저지른 집단이 민간인을 고의로 사살한 일인데 이를 대하는 한국민의 태도가 너무 다르다.

단순히 북한에 관광하러 갔다 포스터를 떼낸 죄로 15년 강제 노역형에 처해진 후 1년 반만에 뇌사 상태로 미국에 돌아온 오토 웜비어가 이번 주 끝내 사망했다. 사망 원인은 아직 규명되지 않았으나 과거 북한이 잡아가둔 사람들에게 한 행적을 보면 따듯하게 대해주지는 않았을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북한 당국은 자국민이든 방문객이든 터무니없는 구실로 잡아가두고 고문하는 것이 일상화 돼 있는 나라다. 일단 북한 감옥에 갇히면 밖에서 아무리 떠들어도 소용이 없다. 그럼에도 한국에서는 개성 공단과 금강산 관광을 재개하라는 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다. 잠재적 인질 수 천명을 사지로 보내자는 소리와 똑 같다.

북한에는 아직도 한국계 미 시민권자가 여러 명 억류돼 있다. 이들 중에는 오랫 동안 북한 주민들을 도와준 사람도 있지만 이제 와서는 아무 소용 없다. 미국과의 대화 재개나 원조를 뜯어내기 위한 협상용 인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북한엔 아우슈비츠를 능가하는 강제 소용소가 여럿 있고 주민들의 인권이 전혀 보장되지 않는 나라다. 그런 나라를 관광하겠다고 들어간다는 것 자체가 모험이다.

미주 한인들 가운데도 북한의 실상을 바로 보겠다며 방문하려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북한의 실상은 이미 충분히 알려져 있다. 자칫 불귀의 객이 되거나 북한 선전요원이 돼 돌아올 가능성이 높다. 웜비어의 비극이 이런 사람들에게 타산지석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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