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삶에 대한 단상

2017-06-01 (목) 12:00:00 그레이스 홍 / 샌프란시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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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전 중 신호등에 섰다가 경이로운 장면을 목격했다. 도로의 균열을 뚫고 초록의 풀이 솟아 있었다. 자동차 바퀴에 짓밟히지 않고 질긴 생명력으로 노란 꽃까지 피우고 있는 모습이 신기하고 가슴이 짠했다. 그래, 산다는 건 생명을 내어놓는 절실함이구나.

햇빛도 잘 들지 않는 주차장 뒷담 밑에 외로이 핀 한 그루의 장미를 발견했을 때 한참을 쪼그리고 앉아 쳐다보았다. 그래, 산다는 건 아무도 눈길 주지 않는 모퉁이에서도 품위 있게 꽃 피우며 때를 기다리는 거구나.

늦은 저녁 수영장 불빛을 환하게 받은 잔디밭에 민들레 홀씨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잠자리에 누워서 홀씨들을 사진에 담지 못한 아쉬움에 뒤척였다. 아침 일찍 가보니 어디론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래, 산다는 건 기회가 왔을 때 바로잡지 않으면 되돌릴 수 없는 거구나.


먼 나라의 지진 소식을 듣는다. 자연재해 앞에서 울부짖는 안타까운 모습이 두려웠다. 지진이 낯설지 않은 캘리포니아에 살면서 삶과 죽음이 내 뜻대로 되지 않음을 실감한다. 하지만 우리는 영원히 살 것 같이 날마다 바쁘고 치열하게 나날을 보낸다.

만약 내 삶의 종말이 가까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 감지하여 알 수 있다면, 욕심도 미움도 내려놓고, 가슴속 응어리로 남아 있는 누군가를 용서 못할 이유가 없어질 것이다. 그래, 산다는 건 지금 바로 이 자리에 내가 이렇게 살아있음이다.

오래된 고구마를 물 컵에 담가 놓았다. 며칠 뒤 싹이 트고 새순이 가늘게 나오고, 가지가 뻗어 올라오고, 초록의 잎사귀들이 가지마다 매달리기 시작했다. 그래, 산다는 건 발 디딘 그곳에서 그냥 뿌리내리는 거구나.

<그레이스 홍 / 샌프란시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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