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봄날은 간다

2017-04-29 (토) 김완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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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의 어린 사랑/ 그 머릿결, 눈빛,/ 갖고 싶은 열망 그대론데/창밖 꽃잎 하늘하늘 지고 있네/ 꽃잎들 웃음 지며/ 다시 돌아온단 손짓 고마워도/ 돌아오지 못할 계절 속으론/ 점점 내가 먼저 가는 것을”(봄날은 간다 전문)내 젊음은 불온했다. 애인도 있었으나 신채호, 미셜 푸코 같은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를 더욱 흠모하였다. 권력, 종교, 도덕을 조롱하며 여자를 사랑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도둑고양이처럼 어두운 골목길을 은밀하게 드나들었으나 그래도 내 인생의 황금기였다.

그때를 추억하며 오래간만에 시를 썼다. ‘봄날은 간다’라는 구태의연한 제목으로. 물론 지금은 내 청춘도 볼품없이 사위었다. 소망이 있다면 꽃답게 지고 싶다는 것.

‘봄날은 간다’는 백설희가 부른 대중가요지만 이제 한국인에겐 한을 표현하는 숙어처럼 사용된다. 영탄 아니 한탄에 사용되는 관용구로, 노래로 이만한 것도 없는 듯하다. 너무 환해서 더욱 슬픈 봄날의 정서를 역설적으로 표현한 이 노래는 이미자, 배호, 조용필, 나훈아, 장사익, 한영애 등 여러 가수들이 리메이크하기도 했다. 개인적으론 유일하게 좋아하는 트로트 ‘봄날은 간다’는 똑같은 제목으로 기형도의 시가 있고, 드라마, 영화도 있다.


이 고착화되고 화석화된 의미에 편승하는 것은 안이한 감정표현이지만, 그래도 마음속 안타까움을 ‘봄날은 간다’는 탄식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실로 삼십년 만에 테니스를 쳤다. 대학 때 테니스 동아리에서 주전으로 활약했던 실력은 오간 데가 없었다. 이미 그때의 내가 아니었지만 그래도 신체변화가 너무 놀라와 엉엉 울 지경이었다. 아직도 “마음은 이팔청춘”인데 몸은 오십 후반의 초로의 늙은이란 걸 처절하게 인정해야만 했다.

마음은 이팔청춘! 여기서 마음이란 생각이고 욕망이며 이팔청춘은 존재이며 시간이다. 생각과 존재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철학적으로 규명이 끝난 얘기다.

잠깐 언급하면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선언은 어떤 혁명보다 위대하다. 인류가 신이란 장막을 벗고 개인적 자아를 확립하게 해준 단초로서, 오늘날 민주주의를 탄생하게 해준 기원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각한대로 존재하는 자기 투명성을 지난 인간은 없다. 즉, 인간은 생각대로 살 수 없다. 욕망대로 살 수 없는 것이다. 이 욕망조차도 나의 것이 아니라고 작크 라캉은 설파한다. 남들이 좋다거나, 갖고 싶다거나, 부러워하는 것들을 나도 선망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타자의 욕망을 내가 욕망한다는 것이다.

사람은 태어나 성장하면서 규범과 도덕을 지키며 살아가게 된다. 욕망은 이 사회화 과정에서 발생하는 억압을 통해 무의식속에 내면화된다. 그러나 욕망은 욕망하는 실재를 명확히 반영할 수 없음으로 결국은 다 채울 수 없는 것이라 한다.

욕망은 살아 있는데 육체는 노쇠하여 서로 불화가 생기는 것이다. 이 불화를 어떻게 해결한단 말인가. 물론 인생 문제에 정답은 없다. 다만 오답만 있을 뿐이다.


나는 이제 내 육체적 젊음이 끝났음을 인정해야 한다. 다만 정신적 젊음만은 늘 유지하도록 지적 호기심을 잃지 않아야 한다. 신문 보고, 책 읽고, 사색하고......

비록 육체적으론 힘을 잃고 쇠잔해 갈수록 정신적으론 깊고 넓어간다는 자기위로를 해야겠다. 이게 근거 없는 것일지라도 긍정의 힘은 부정적인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흘러간 강물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하여 삶은 허망한 것이라 단정하면 너무 염세적이고,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이라 하며 삶을 정돈한다면 너무 도사연(道士然)하는 것 같고......

시간의 모습은 원과 직선이다. 원은 자연. 우주의 시간이고 직선은 동물. 인간의 시간이다. 우주의 시간은 영원하지만 인간의 시간은 찰나라는 것을, 지는 꽃잎이 새삼스럽게 일깨워줬던 것이다.

대부분 모든 생명체는 전성기를 거쳐 소멸한다. 기막히게 아름다운 봄날이 가고 있었다.

<김완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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