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도반을 찾아서

2017-04-22 (토) 김덕환 실리콘밸리 부동산 중개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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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것 봐요, 사슴이에요! ”언덕 위에 대형 접시 모양의 인공위성 지구국 안테나가 설치되어 있어서 스탠포드 디시 하이크 (Stanford Dish Hike)라고 이름 붙여진 산책로를 오를 때였다. 4마일의 그 길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던 중키의 금발여인이 내게 손짓하며 언덕 위 나무그늘을 가리킨다. 100미터 쯤 위를 자세히 보니 과연 암사슴 한마리가 무리에서 벗어나 우두커니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다.

몇 가지 일이 동시에 복잡하게 진행이 돼 신경을 좀 썼더니 입안이 온통 헐었다. 컨디션이 별로 좋지 않아서 일요일 아침마다 나가던 20km 달리기 대신 캠퍼스 뒤 언덕길 산책에 나섰다. 약간 쌀쌀하긴 했지만 일요일을 집안이나 커피숍에서 무료하게 보낼 수는 없는 일. 마음을 다잡고 한참을 걷던 끝에 1마일 정도 남은 지점에서 뉴욕에서 실리콘밸리로 출장왔다는 카렌과 말을 나누게 되었다.

“눈이 예리하네요!” 했더니 그는 ‘독수리의 눈을 가졌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며 자신은 사물을 아주 자세하게 보는 편이라고 했다. 그리고는 좀 전에 길섶에서 찍었다며 코스모스처럼 생긴 이름 모를 빨간 야생화 사진을 스마트폰으로 보여준다.


촉촉한 흙을 구멍 주위로 밀어내고 고개만 삐죽 내민 채 땅 위로는 나오지 않는 겁 많은 두더지를 찍은 사진을 내가 보여주자 우리는 금세 좋은 길동무가 되었다. 뉴욕 나스닥 증권시장에서 일한다는 그는 실리콘밸리 기업고객들과의 미팅 차 출장 왔다가 뉴욕으로 돌아가기 전 잠시 짬을 내 산책하러 왔다고 했다.

새로운 상장사를 많이 발굴해야 하는 과업은 이해가 되지만, 이미 상장이 완료된 기업들에 대해서도 마케팅이 필요하다면 과연 어떤 일일까. 나스닥 상장사들에 대한 주식거래 편의성을 제고해서 그들이 자본조달을 원활히 해 나가는데 불편한 점은 없는지 끊임없이 점검하고 문제점을 해결해 줘서 그들이 뉴욕증시 같은 타 시장으로 옮겨가지 않도록 하는 일일 것이라는 짐작을 해보았다.

그는 캐나다 태생으로 어릴 적 국제 비즈니스를 하던 부친을 따라 홍콩에서 7년간 살 때 한국에도 가보았다고 했다. 과거 실리콘밸리에 살다가 20년 전 나스닥에 선발되어 뉴욕, 웨스트 센트럴 파크 지역에 자리를 잡았단다. 얼마 전 캐나다 국적을 포기하고 미국 시민권자가 되었고, 나스닥의 3,000여 상장사를 포함, 1만2,000여 고객사에 대한 마케팅 업무를 담당하며 바쁘게 사는 삶이 보람 있다고 말할 때엔 커리어우먼의 자신감이 넘쳤다.

한국 기업고객도 있는지 물어보니, 자신이 담당하는 기업 중에는 없지만 다른 사람 담당기업 중에 분명히 있을 것이라는 대답이다.

그는 미술품 수집에도 관심이 있다며 뉴욕 행 비행기 탑승까지 남은 두시간 동안 샌프란시스코의 대표적 현대 미술관인 디 영 뮤지엄(De Young Museum)을 둘러본다며 바쁜 걸음을 재촉했다. 시간을 계획성 있게 쪼개 쓰며 빈틈없이 사는 모습을 보니 나에게도 자극이 되었다.

불교에서는 일생을 살면서 같은 길을 서로 도우면서 함께 가는 좋은 벗을 도반이라 한다고 들었다. 언제쯤 좋은 도반을 만나게 될까 설렘 속에 상상 속의 도반을 조우하게 될 그 순간을 기다리며 사는 일도 아름답다. 그렇다고 너무 완벽한 도반을 찾느라 소중한 여생을 허비할 수는 없는 일. 자기 자신이 완벽하지 않은 존재라는 것을 인정할 때 비로소 다른 이의 허물도 도드라져 보이지 않는 법이다. 길지 않은 여생, 마음속 깊은 이야기를 털어놔도 부끄럽지 않을 좋은 도반을 찾아 도란도란 인생길을 함께 갈 수 있다면, 삶의 무게가 우리를 짓누르는 순간이 오더라도 우리는 평정과 미소를 잃지 않으며 아름답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살면서 영원할 것 같은 친구와도 멀어지는가 하면 예상치 않은 길목에서 멋진 도반을 만나기도 한다.

마지막 갈 길을 차마 못가고 아직도 쌀쌀한 바람으로 주위를 맴돌던 샌프란시스코 겨울의 끝자락을 산책하면서, 비록 30여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푸른 하늘 아래 좋은 도반을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던 오늘은 참 멋진 날이다.

<김덕환 실리콘밸리 부동산 중개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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