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타이태닉호의 메아리

2017-04-15 (토) 김영수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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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세월호 인양 작업을 지켜보는데 타이태닉호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그 침묵하는 메아리까지도. 3년 전 세월호가 침몰한 4월16일은 우연히도 102년 전 타이태닉호가 침몰한 날과 겹친다.

캐나다의 동쪽 끝에 노바스코샤라는 주가 있다. 그곳에 가면 타이태닉호 침몰 당시 구출 작업이 이루어졌다는 항구 핼리팩스와 대서양 해양박물관(Maritime Museum of the Atlantic)을 볼 수 있다. 박물관에는 북대서양을 횡단한 타이태닉호에서 인양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한 치 앞을 모르는 우리가 100여 년 전 일이라고 마치 다른 세상일을 구경하듯 유물 앞에서 태연할 수 있는 것은, 어찌 보면 다행스러운 일이다.

1912년 4월15일. 희망을 싣고 출범한 지 며칠 되지 않아 배가 빙산과 충돌했다. 당시로서는 엄청난 규모의 승선 인원인 2,000여 명이 생명을 의지할 구명정은 20척밖에 없었고, 배의 반 이상이 물에 잠길 때까지 승객의 반도 탈출하지 못한 채 배는 급속도로 기울었다고 한다.


역사가 기억하는 대형사고가 휩쓸고 간 자리에서 우리는 뒤늦게 배울 것이 많다는 점을 깨닫곤 한다. 큰 것을 잃지 않으려면 사소한 일에도 관심 갖고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작은 물방울 하나도 어디에 어떻게 구르느냐에 따라 그 힘이 모이면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기도 하고 거대한 바위를 갈라놓기도 한다.

물에 잠긴 승객의 대다수는 영국과 스칸디나비아 반도 등에서 새로운 삶을 찾아 미국으로 가는 이민자들. 소위 아메리칸드림을 실현하고자 고향을 등진 노동자들이었다. 가난은 불편한 것으로 그쳐야 한다. 가난 때문에 무릎을 꿇거나 생명에 위협을 받으면 이미 가난이 아닌 폭력이 된다. 3등석 노동자들은 꿈을 이루기 위해 몇 달을 벌어 마련한 표 한 장에 목숨을 저당 잡힌 셈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돈 없고 힘없는 계층에서 희생자가 많은 것은 크게 변하지 않는 모양이다.

시신 인양 작업을 할 때 시간에 쫓기던 구조대원들은 외양을 보고 그럴듯하게 잘 차려입은 1등석 시신을 먼저 구조했다고 하니, 죽어서조차 겉으로 보이는 외양이 내면의 모습보다 더 영향력을 미치는가. 장례 조문객의 숫자나 조문 행렬의 자동차를 세는 것으로 죽은 사람 생전의 삶을 평가하는 요즈음 세태와 무엇이 다르랴 싶다.

아비규환 속에서도 침착하게 평온을 유지한 사람들 이야기가 오래 회자되고 있다. 배의 설계자와 기관장, 화부, 전기 수리공 등이 최후까지, 그러니까 침몰하는 순간까지 자신의 임무를 다하다가 배와 운명을 같이했다는 설명에 아직도 가슴이 먹먹하다. 인격이나 인품은 말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직접 행동으로 보여줄 때 진정한 가치를 드러낸다. 당연할 수 있는 일에 이토록 낯설어하고 울컥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운 좋게 살아남은 승객 중, 그날 갑판 위에서 침몰 10여분 전까지도 울리던 바이올린 연주를 기억하는 이들이 있었다. 무엇이 연주자들에게 두려움을 잊고 연주에 몰두할 수 있게 했을까, 그것이 궁금했다. 신앙의 힘이었을까?감리교회 신자들이었다고는 하지만 교회 신자라고 다 그렇지는 않았을 터. 그들에게 음악은 시간에 갇힌 이승의 언어이자 시간을 벗어난 피안의 언어였을지도 모른다. 연주하는 동안 시간과 공간의 경계가 지워지고 삶과 죽음의 경계마저 사라진, 우주와 하나가 되는 순간을 경험한 게 아닐까 싶었다.

침몰 마지막 몇 분을 남기고 그들은 연주를 멈추고 헤어졌다. 불행하게도 그들 모두 살아남지 못했다고는 하나, 그들이 남긴 음악은 꺼져가는 생명의 마지막 순간에 평화를 안겨주는 소중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급박한 상황에서 충동적인 감정과 본능에 휘둘리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숱한 경험으로 익히 알고 있으면서도 실천하기는 실로 어렵다. 그러나 이 배에서의 두 시간 사십 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이성은 힘을 잃지 않고 침착하게 판단하여 행동하도록 이끌었다. 그 결과 약자인 여성과 어린이 대부분이 먼저 구출될 수 있었다.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이성과 감성의 힘의 조화가 그들의 마지막 순간을 숭고하고도 아름답게 만들었을 것이다. 삶에 대한 원초적인 질문에는 답이 있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며 어떻게 죽느냐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 속 인물들이 보여주는 생의 다양한 마무리는, 어떻게 사는 게 가치 있는 삶인지 생각하게 한다.

<김영수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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