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선입견과 착오

2016-12-23 (금) 08:13:37 문일룡 변호사 페어팩스 카운티 교육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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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난 몇 달 동안 페어팩스 카운티 교육청의 성인과 지역사회 교육부(Adult and Community Education)에서 제공하는 스페인어 기초반에 등록해 공부했었다. 주중에는 도저히 시간을 낼 수 없어 토요일 수업을 들었는데 12주 단위를 한 학기로 해서 지금까지 두 학기를 마쳤다.

스페인어 공부의 필요를 느낀 것은 사실 오래 전부터였다. 그러나 그 동안 실천에 옮기지 못했다가 지난 여름에 큰 마음 먹고 시작했다. 대신 토요일 수업이다 보니 토요일 스케줄이 자유롭지 못해졌다. 그래도 보람을 느낀다. 왜냐하면 페어팩스 카운티 공립학생들 중 거의 4분의 1이 히스패닉인데, 교육위원으로서 아주 기본적 인사 정도는 스페인어로 할 필요를 느끼기 때문이다. 그래야 스페인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학생들과 부모들에게 다가가는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런데 매 번 숙제를 미리 못하고 수업 당일 아침에 했다. 그것도 집에서는 정신 집중에 자신이 없어 동네 맥도날드에서 말이다. 맥도날드에서 숙제를 하다 보면 그 곳의 히스패닉계 종업원들에게 한두 가지씩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발음이나 간단한 문장 번역에 도움을 청하면 아주 반갑게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때로는 좀 더 깊은 도움이 필요할 경우도 있었다. 일하는 사람들을 오래 붙들고 있을 수 없어 혹시 손님들 가운데 히스패닉계가 없나 두리번거리기도 했지만 실제로 도움을 청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내가 즐겨 앉는 자리 바로 앞에 히스패닉으로 보이는 남자가 오래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나도 보통 3시간 정도는 머무는데 그 사람도 줄곧 앉아 있는 것이었다. 차림새를 보니 일용직 건축 노동자처럼 보였다. 아마 그 곳에서 일감 줄 사람을 찾는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 되었다. 그런데 3시간 이상 일감을 못 찾는 것을 보니 내 마음이 다 초조해졌다. 내가 도와 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 사람은 그 자리에서 마시던 음료수를 계속 다시 채워 마시면서 핸드폰 음악을 듣기만 했다.

그 사람에게 몇 주 째 눈인사만 하다가 하루는 용기를 내어 말을 걸어 보기로 했다. 숙제인 스페인어 대화 본문을 한 번 읽어 볼테니 발음을 교정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내가 보여 주며 읽어 나가고 있는 내용을 못 알아보는 듯 했다. 번득 그 사람이 문맹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히스패닉계 주민들 가운데 교육을 못 받아 말은 하지만 글을 못 읽는 사람들도 제법 된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학생들도 많이 있다는 보고를 접했던 생각도 났다. 그 날 나는 그 사람이 혹시 당황할까 봐 못 읽는다는 것을 눈치 챘음에도 불구하고 모른척하며 고맙다고 인사하고 마쳤다.

그런데 그 다음 주 토요일 같은 장소에서 그 사람이 어느 백인 손님과 대화를 나누는 것을 보았다. 그 백인은 그 사람에게 애플파이도 건네주는 등 친한 사이처럼 보였다. 그 백인이 일감을 주나보다 했는데 그렇지는 않았다. 궁금증을 참지 못한 내가 그 백인에게 다가가서 어떤 사이냐고 조용히 물어 보았다. 그랬더니 그냥 오랫 동안 맥도날드에서 만난 사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일감을 찾는게 아니고, 가까운 곳에 사는데 토요일에는 집에서 특별히 할 일이 없어서 산책 겸 맥도날드에 와서 아침도 먹고 좋아하는 음악도 들으면서 시간을 보낸다는 것이었다. 자기는 그가 애플파이를 좋아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냥 인사차 가끔 사준다고 했다.

나는 내친 김에 그 사람이 스페인어를 못 읽는 것 같은데 혹시 그가 문맹자냐고 물어 보았다. 그런데 아니라고 했다. 심지어 그 사람은 히스패닉도 아니란다. 필리핀 사람이며 스페인어는 못 하지만 대신 영어는 좀 한다고 했다. 맙소사! 나는 그냥 그의 차림새만 보고 그가 히스패닉계 일용직 건축 노동자이며 문맹자라고 단정해 버린 착오를 범한 것이다. 너무 미안하고 창피했다.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지 말라고 학생들과 주민들에게 종종 얘기해 온 이민자 출신 교육위원인 나 자신도 전형적인 선입견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문일룡 변호사 페어팩스 카운티 교육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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