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돌고 도는 역사

2016-12-07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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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12월 7일 일본은 미국 태평양 함대 본부가 있는 펄 하버에 대한 기습을 감행했다. 6척의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353대의 전투기와 폭격기 등은 8척의 전함을 공격해 이중 4척을 가라앉히고 3척의 순양함, 3척의 구축함을 부수거나 침몰시켰으며 188대의 미군기를 파괴했다. 2,400여명의 미군이 죽었고 1,100여명이 부상당했다. 일본군의 피해는 비행기 29대 격추와 비행사 64명 사망 등 미미했다. 그 자체로만 보면 일본의 진주만 공격은 완전에 가까운 성공이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그것은 일본의 몰락을 결정짓는 사건이기도 했다. 당시 미국은 지금처럼 ‘미국 먼저’(America First) 운동이 기세를 올리며 고립주의에 빠져 있었다. 히틀러가 유럽 전역을 장악하고 영국마저 풍전등화의 위기에 몰려 있는데도 미국인들은 먼 나라 이야기인양 전쟁에 참여할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일요일 아침 난데 없이 일본에 뒤통수를 맞고 난 뒤에는 완전히 사회 분위기가 바뀌었다. 모든 미국인이 일치 단결해 응징에 나섰다. 지금이나 그 때나 한데 뭉친 미국을 이길 나라는 없다. 일본은 진주만에서 여러 척의 배를 가라앉히고 비행기 100여대를 부쉈다고 좋아했지만 이는 미국이 생산할 수 있는 능력에 비교하면 미미한 숫자였다. 미국이 2차 대전 중 생산해 낸 비행기는 30만대가 넘고 전쟁 말기 보유하고 있던 군함은 6,700대, 총 병력은 1,200만 명에 달했다. 진주만에서 파손되거나 가라앉은 배들마저 애리조나 호를 제외하고는 다시 수리해 전투에 사용됐다. 결국 일본은 잠시 기분만 좋았지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린 것 이외에는 한 것이 없었다. 애리조나 호가 침몰한 자리에는 지금 진주만 기습 기념관이 만들어져 있다.


일본인들 중에서도 미국의 힘을 알고 있었던 인물이 있었다. 해군 총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그 중 한 사람이다. 그는 미국과 전쟁이 벌어지면 “6개월에서 1년 정도는 잘 뛰어 보겠지만 그 다음은 모르겠다”고 말 한 적이 있다. 일본은 진주만 기습 후 정확히 6개월 뒤인 1942년 6월 4~7일 벌어진 미드웨이 해전에서 참패하면서 주력인 항공모함 4척을 잃고 태평양의 제해권을 미국에 넘겨줬다. 이 전투 패배는 사실상 일본의 운명을 결정했다.

세계적인 휴양지 와이키키 해변이 인근에 있는 하와이의 진주만이 피로 물든지 7일로 75주년이 된다. 당시 철천지 원수였던 미국과 일본은 이제 세계에서 가장 가까운 우방이 됐다. 미국도 일본도 뜨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두 나라의 협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외국 지도자 중 제일 먼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자와 만난 일본의 아베 신조 총리는 이 달 말 오바마 대통령과 함께 진주만을 방문한다고 밝혔다. 지난 5월 오바마의 히로시마 방문에 대한 답방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일본 지도자가 진주만을 찾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미국의 원폭 투하로 14만 명이 죽은 히로시마와 일본의 기습 공격으로 2,400명의 미군이 죽은 진주만을 양국 지도자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찾는 것은 아픈 과거의 상처를 씻고 새로운 협력 관계를 돈독히 해나가자는 의지를 보여준 것으로 읽을 수 밖에 없다.

반면 2차 대전 때 미국의 우방으로 일본과 맞서싸우던 중국은 이제 미국의 경쟁자로 떠오르며 요주의 국가로 바뀌었다. “국가 간에는 영원한 친구도 영원한 적도 없다. 영원한 이익만이 있을뿐이다”던 파머스턴 경의 말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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