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빨리빨리’는 이제 그만

2016-10-21 (금) 구성훈 경제부·부국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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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거실 소파에 앉아 TV를 보는 시간이 확 줄었다. 집에서 랩탑 컴퓨터를 사용하는 시간도 줄었다. 모두가 스마트폰 때문이다.

스마트폰에 설치한 케이블 TV 앱으로 침대에 편하게 누워 폰으로 거의 모든 TV 채널을 라이브로 시청할 수 있다. 스마트폰만 있으면 몸이 어디에 있든지 웹서핑이 가능하다.

문서 작업을 할 때나 컴퓨터가 필요하다. 이렇게 편리한 세상이 올 줄 누가 알았겠는가.


스마트폰 하면 떠오르는 회사는 ‘애플’과 ‘삼성’이다. 9년 전 애플이 아이폰을 선보이며 스마트폰 시대를 열었다면 삼성은 ‘갤럭시’ 브랜드를 앞세워 스마트폰 세계시장 점유율 1위를 달성했다. 미국에 사는 한인들은 유독 한국산 스마트폰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다.

아이폰도 많이 쓰지만 주위를 둘러보면 삼성이나 LG폰을 사용하는 사람도 꽤 많다. 애플과 함께 스마트폰 양대산맥으로 자리매김한 ‘기술’의 삼성이 휘청거리고 있다.

스마트폰 배터리 발화 때문이다. 숙명의 라이벌 애플 타도를 외치며 지난 8월 초 역대급 스마트폰 갤럭시 노트7(이하 노트7)을 공개했지만 배터리 발화 문제를 잡아내지 못해 두 달 만에 결국 ‘단종’이라는 극약처방을 내렸다. 정말 안타깝다.

노트7은 지문인식에 홍채인식을 더해 보안을 강화한데다 세련된 디자인과 색상으로 출시되자마자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하지만 여기저기서 배터리 발화 사례가 보고되면서 리콜이 실시됐고, 교환한 새 제품에서도 계속 불이 나자 결국 생산 및 판매를 영구적으로 중단했다.

노트7을 구매한 LA의 한인 소비자들도 노트7 사태로 큰 혼란을 겪고 있다. 지난 15일부터 연방정부가 미국에서 노트7의 항공기내 반입을 금지한 사실을 모르고 폰을 공항에 가져갔다가 압수당해 폰에 저장되어 있던 사진과 연락처를 통째로 날리는 사례가 보고되는가 하면 미국과 한국에서 전화기 발화로 불편을 겪었다며 소비자들이 집단소송까지 제기해 삼성을 곤혹스럽게 만들고 있다. 오리지널 노트7을 지금도 사용하는 직장인 박모(45)씨는 “불안하긴 하지만 당장 원하는 폰으로 교환할 수가 없어 노트7을 쓰고 있다”며 “지인들로부터 ‘폭탄’을 들고 다닌다는 비아냥을 계속 듣고 있다”고 전했다.

하필 할러데이 샤핑시즌 직전에 노트7 사태가 터진 점은 삼성으로서는 뼈아프다.

아이폰7, 구글 픽셀폰 등 타사의 프리미엄폰과 경쟁해야 할 제품이 사라졌으니 속이 까맣게 타들어갈 것이다. 노트7 사태로 인한 삼성의 금전손실이 50억달러를 상회할 것이라는 언론보도가 잇따르고 있지만 더 큰 문제는 수십년간 쌓아올린 브랜드 이미지가 훼손된 것이다.


삼성은 그동안 ‘발 빠른 추격자’(fast follower) 전략으로 세계에서 유일하게 애플과 맞장을 뜰 수 있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그 배경에는 한국사회 특유의 ‘빨리빨리’ 문화가 있다.

애플은 디자인과 설계만 할 뿐 제품 생산은 하청을 주지만 삼성은 자체 생산공장을 보유하고 있어 제품 기획단계에서부터 출시까지 걸리는 기간이 애플보다 훨씬 짧다. 삼성이 생산하는 스마트폰 종류만 수십여종에 달하며 최고급 모델도 해마다 봄에는 갤럭시 S 시리즈, 가을에는 갤럭시 노트 시리즈 신제품이 각각 출시된다.

삼성이 신제품을 출시할 때마다 느끼는 것은 애플을 지나치게 의식한다는 점이다. 항상 아이폰이 출시되기 전에 갤럭시폰을 내놓아야 한다. 노트7도 아이폰7 보다 한달 먼저 출시됐다. ‘속도전의 함정에 빠졌다’, ‘애플과의 혁신 경쟁 강박증에 걸렸다’는 지적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조금 더 다듬어서 신제품을 애플과 같은 시기에 출시해 맞대결을 벌일 자신이 없는 걸까.

갤럭시 신화를 만든 것은 애니콜 화형식으로 일컬어지는 이건희 회장의 품질개선 의지 때문이다. 좀 늦더라도 품질은 최고여야 한다는 의지가 있었기에 오늘의 삼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빠르기만 한 1등은 진정한 1등이 아니다. 치타가 백수의 왕은 아니지 않은가.

<구성훈 경제부·부국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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