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토론의 힘

2016-09-28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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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건국 초기에는 정치인이 공직을 탐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 중 하나가 ‘미국의 아버지’로 불리는 조지 워싱턴이었다.

“출마하지 않을 경우 신생 미국의 앞날이 어둡다”는 측근의 적극적인 설득에 못 이겨 겨우 나왔지만 캠페인 한 번 하지 않았는데도 선거인단 전원으로부터 표를 받아 대통령에 당선됐다. 대통령이 만장일치로 선출된 것은 미국 역사상 워싱턴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요즘 대통령 뽑을 때마다 빠짐없이 등장하는 후보자 토론이 처음 시작된 것은 1858년이다. 이 때 에이브러햄 링컨과 스티븐 더글러스는 연방 상원 자리를 놓고 7차례나 토론을 벌였다. 토론 형식은 사회자 없이 한 후보가 먼저 1시간 기조연설을 하고 다른 후보가 1시간 반 동안 반박 연설을 하며 첫번째 연설한 후보가 마지막으로 30분 동안 재반박 연설을 하는 식으로 돼 있었다. 장장 3시간에 걸친 토론회를 일곱 차례나 벌였는데도 토론회장은 방청객으로 가득 찼다.


최초의 라디오 토론은 1948년 오리건에서 공화당 대선 후보인 토머스 듀이와 해럴드 스태슨 사이에서, 최초의 TV 토론은 1960년 시카고에서 민주당의 잭 케네디와 공화당의 리처드 닉슨 사이에서 벌어졌다. 이 때 닉슨은 자신의 박식과 정치적 경륜을 유감없이 발휘했으나 어딘가 음침한 인상에다 땀을 비 오듯 흘리는 모습을 보여줘 결국 표를 깎아 먹고 선거에서 지고 말았다. 자신의 패배가 TV 토론 때문이었다고 판단한 닉슨은 68년과 72년 선거 때는 토론을 거부했으며 그 덕인지 두 번 다 선거에서 이겼다.

토론이 선거 결과를 좌우한 케이스로 꼽히는 것 중 하나가 1976년 제럴드 포드와 지미 카터 간의 대결이다. 여기서 포드는 “소련의 동유럽 지배는 없고 포드 행정부 하에서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실언을 하는 바람에 카터에게 어부지리를 안겨줬다.

1980년 카터와 로널드 레이건과의 토론에서 카터가 레이건을 극단주의자로 몰아붙이자 레이건은 “또 그 얘기냐”(There you go again)고 가볍게 맞받아쳐 승기를 잡았다.
1984년 월터 먼데일과의 토론에서도 레이건은 “나는 정치적인 이유로 상대방의 젊음과 무경험을 이용하지 않겠다”고 말해 먼데일을 비롯한 청중들의 웃음보를 터뜨리며 압승을 거뒀다.

1988년 부통령 후보 토론에서는 공화당의 댄 퀘일이 자신을 잭 케네디에 비교하다 로이드 벤슨으로부터 “당신은 잭 케네디가 아니다”라는 직격탄을 맞았고 2000년 선거에서는 앨 고어가 아들 부시가 말을 할 때마다 혀를 차고 비웃는듯한 모습을 보였다 오히려 여론의 역풍을 맞았다. 관계자들은 이 때 고어가 조금만 겸손한 모습을 보여줬더라면 백악관의 주인이 바뀌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26일 뉴욕 호프스트라 대학에서 열린 힐러리 클린턴과 도널드 트럼프 간의 대결은 힐러리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다는 것이 중론이다. 트럼프는 처음 20~30분 간은 뭔가 좀 보여주는 듯 하다 그 이후로는 클린턴의 페이스에 말려 이리저리 끌려 다니거나 상대방의 말을 끊으며 우왕좌왕 하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이런 그의 모습이 근소한 차로 좁혀진 여론 조사에 어떻게 반영될 지는 미지수다. 그의 지지자들 가운데 제 정신이 아닌 것으로 보이는 사람이 상당수이기 때문이다.

클린턴-트럼프와 링컨-더글러스 토론 내용을 비교해 본다면 150년 동안 미국 유권자와 정치인의 수준이 얼마나 추락했는지 한 눈에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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