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사기·성범죄의 단골 표적 ‘모델 지망생’

2016-08-02 (화) 김영경 객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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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델업계 진입장벽 유별나게 높아

▶ 먹잇감 던지면 대부분이 걸려들어

■당하고 당해도 결국 또 당하는 그들

전직 마이애미 경찰관인 레이본트 플랜터스는 지난 10년간 깨어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온라인에서 여성 모델을 스토킹하는데 사용했다. 오랫동안 숱한 가명을 써가며 모델 에이전시 스카우터 행세를 해온 플랜터스는 온라인을 통해 접촉한 여성모델들을 사우스 플로리다로 유인, 약을 탄 음료수를 마시게 해 정신을 잃게 한 후 동업자인 에머슨 캘럼에게 넘겨 이른바‘강간 비디오’를 찍었다.

검찰이 최근 법원에 제출한 기소장에 따르면 플랜터스의 마수에 걸린 피해자들은 의식이 끊긴 무방비 상태에서 카메라가 설치된 방으로 끌려가 몸에 문신을 한 건장한 남성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그러나 수백명을 헤아리는 피해자의 상당수는 친구나 가족, 심지어 낯선 타인으로부터 음란 동영상에 관한 얘기를 듣기 전까지 자신이 무슨 일을 겪었는지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했다.


피해자의 동영상을 온라인과 오프라인 포르노업자들을 통해 대대적으로 유통시킨 플랜터스와 캘럼은 인신매매 등의 중범죄로 기소돼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최근 모델업계의 어두운 이면을 파헤치는 탐사보도 시리즈로 화제를 모은 CNN머니에 따르면 모델을 노리는 사기꾼들은 대개 크게 두 유형으로 나뉜다.

첫 번째 유형은 모델과 그의 가족에게 “성공의 환상”을 심어주며 돈을 뜯는데 그치지만 두 번째는 플랜더스와 캘럼처럼 성적 착취를 가하는 등 지극히 위험하고 유해한 상황을 만들어낸다.

CNN머니의 탐사취재팀은 모델업의 메카로 통하는 뉴욕의 평판 좋은 에이전시들조차 규제당국으로부터 라이선스를 발급받지 않는 경우가 흔하다며 “이처럼 통제되지 않은 환경에서는 사기가 판을 칠 수밖에 없고 결과적으로 젊은 모델 지망생들이 속절없이 피해를 당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모델업계는 외부에서 뚫고 들어가기 힘들기로 악명이 높다. 어떻게 해서라도 안으로 들어가려는 모델 지망생들은 지푸라기라도 잡을 만큼 필사적이다. 이들을 사기에 취약하게 만드는 또 하나의 이유다.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는 모델 지망생은 온라인에 자신의 프로필을 공개한다. 여기엔 사진은 물론 세세한 개인신상정보와 나이, 몸의 치수까지 담겨 있다.

먹이를 찾는 사기꾼들에게 이보다 더 좋은 ‘작업용’ 자료는 없다.

한 인기 모델링 웹사이트에 따르면 플랜더스는 숫한 여성의 이름을 가명으로 사용해가며 사이트에 프로필을 띄운 모델 400명에게 접근, 오디션이라는 ‘낚시 밥’을 던졌다.


샌안토니아에서도 모델링 프로모터로 위장한 남성이 미성년자를 포함, 100여명의 남녀를 모집해 누드 사진과 섹스 비디오를 찍게 했다.

제머스 리 사이먼스라는 이름의 남성은 피해자들에게 일단 나체사진을 찍어 몸매를 검증받아야 한다고 설득했다.

요구에 응한 모델 지망생들에게는 “말을 듣지 않으면 온라인으로 나체사진을 공개하겠다”고 협박해 결국 노골적인 사진과 섹스비디오까지 촬영했다.

이 지경에 이르면 모델 지망생은 대부분 공갈협박범에 의해 조종되는 포르노 배우로 전락하고 만다.

사이먼스는 아동음란물 배포 등의 혐의에 유죄가 인정돼 종신형을 선고받고 현재 복역중이다.

사기꾼들은 젊은 여성 모델로부터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개인적인 친분관계를 맺기도 한다.

익명으로 CNN머니에 자신의 경험담을 털어놓은 한 젊은 여성은 “어느 날 페이스북에서 매력적인 남성 모델로부터 자신이 속한 유명 에이전시에서 함께 일하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고 무척 설렜다”고 털어놓았다.

이들은 전화로 밤늦게까지 대화를 나누었고 결국 그가 속한 에이전시의 탈렌트 스카웃을 만나보기로 했다.

그녀의 의심을 털어내기 위해 상대 남성은 같은 소속사의 모델이라는 젊은 여성과 연결시켜주었고 파리 지사장 명의의 이메일까지 보냈다.

그러나 약속 장소인 카페에서 만난 스카웃은 당시 22세였던 그녀의 나이가 모델로는 너무 많다며 성상납을 발탁 조건으로 내걸었다.

충격을 받은 그녀는 곧바로 화장실로 달려가 몇 시간을 숨어 있었다. 훨씬 나중에 그녀는 숱한 모델 지망생들이 똑같은 수법에 말려 강간을 당했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 바닥에선 아무도 믿지 말아야 한다”는게 당시의 경험에서 그녀가 건진 교훈이었다.

돈을 노린 사기는 전혀 새로울 게 없지만 모델업에 대한 당국의 규제와 감독이 거의 없기 때문에 끊임없이 피해자가 나오고 있다.

동원되는 수법의 패턴 또한 유사하다. 모델링 에이전시 간판을 내건 엉터리 회사가 “대성할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감언이설로 모델 지망생은 물론 부모까지 꼬드겨 사진촬영과 훈련 등 각종 명목으로 수수료를 뜯어내는 식이다.

뉴욕의 한 모델링업소는 자녀와 함께 외출한 부모에게 접근, “모델의 자질을 지닌 아이다. 한번 사무실로 찾아와 카메라 테스트를 받아보라”며 명함을 돌리는 케케묵은 수법으로 100명의 피해자로부터 총 20만 달러를 받아 챙겼다.

피해자로 하여금 ‘진짜 에이전시’와 계약을 맺은 것처럼 믿도록 만든 후 각종 수수료를 뽑아낸 뉴저지의 한 회사는 지난 2013년 법집행당국에 꼬리를 밟히자 40만 달러의 법정 밖 합의금을 지불했다.

모델링 에이전시 간판을 내건 이 회사가 모델 지망생에게 제공한 것이라곤 그들의 사진을 올릴 수 있는 웹사이트가 전부였다. 플로리다의 다른 업체도 이와 유사한 사기행각을 벌이다 덜미를 잡혀 220만 달러의 배상금과 350만 달러의 민사 벌금(civil penalties)을 물었다.

그런가하면 잡음을 일으킬 만한 행동을 자제하면서 소속 모델들의 수입을 가로채는데 주력하는 에이전시도 적지 않다.

인기만점의 리얼리티쇼인 ‘미국의 차세대 탑 모델’(America’s Next Top Model) 심사위원으로 활동했던 놀 마린이 이 범주에 속한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모델들이 벌어들인 돈을 개인경비나 비즈니스경비로 사용하다 고발을 당해 법정에 섰다.

피해자들의 권익보호단체 ‘모델 얼라이언스’(Model Alliance)를 설립한 세라 지프는 “당국의 엄격한 인·허가 발급요건과 감독 부재가 문제의 큰 부분을 차지한다”며 “규정을 강화한다고 해서 모든 잠재적 사기꾼을 막아낼 수야 없겠지만 협잡꾼들이 합법적인 에이전트로 행세하기 힘들게 만듦으로써 모델과 그 가족이 이들과 접촉하는 순간 금방 실체를 파악하게끔 도울 수는 있다”고 말했다.

<김영경 객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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