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마추어가 보는 미국역사(99) 미국의 산업화 시대 (1865-1900) ②

2016-04-08 (금) <조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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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추어가 보는 미국역사(99) 미국의 산업화 시대 (1865-1900) ②
표준시간 (Standard Time)

천문학적으로 어느 지역의 정오는 그지역의 바로 위의 상공에 해가 떠 있을 때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론적으로는 계속 자전하고 있는 지상에 셀 수 없이 많은 정오가 있을 수 있지만 교통수단이 느렸을 때에는 지역마다 다른 시각의 정오를 쓰고 있더라도 일상생활에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었다. 마차로 어느 도시를 그 도시의 시각으로 몇 시에 출발하면 어림잡아 목적지 도시의 그 도시의 시각으로 몇 시 쯤에 도착한다고 대강 알고들 살았어도 큰 문제는 없었다. 그런데 기차를 타고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장거리 여행을 하게 될 경우에는 문제가 달라졌다. 도시마다 다른 정오를 가지고 어림잡아 보는 여행시간으로는 엄청난 혼동이 오게 되고 철로가 단선일 경우에는 시간상의 혼동은 열차의 정면충돌이 일어나게 할 수도 있었다.

펜실베니아 철도회사는 동부철도에 필라델피아 시각을 썼는데, 필라델피아 시각은 뉴욕 보다 5분 더 빠른 것이었고 볼티모어 보다는 5분 더 늦은 것이었다. 그런데 인디애나 주 안에만 23개의 다른 시각이 있었고, 일리노이 주에는 27개의 다른 시각이 있었는가 하면 위스콘신 주에는 38개의 다른 시각들이 있었다.


이제는 독자들께서도 시각의 차이에서 야기될 수 있는 문제의 심각성을 짐작하시라고 생각한다. 처음 대부분의 철도회사들은 도착지의 시각을 썼는데 행선지 중간에 있는 지역 들은 극도의 혼동을 피할 수가 없었다. 결국 철도회사들은 천문학적으로 옳은 ‘해시간’을 쓰지않고 인간이 만든 ‘철도시간’을 쓰면 혼동을 피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 철도시간을표준시간 이라고 부르기로 하였다.

이 희안한 해결책은 실제로 집행하기에 별로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미대륙의 지도를 펴놓고 동서로 4등분을 한 후에 세로로 줄을 긋는다. 지상의 거리로는 수 백 마일 씩이 되는 이 시간구역들을 동쪽으로 부터 Eastern, Central, Mountain, Pacific Time Zones 라고 부르고 서쪽으로 가는 Time Zone 의 경계선을 넘을 적마다 한 시간 씩을 낮추어 주면 되는 것이었다. 같은 Time Zone 안에서는 모든 지역이 동일한 표준시간을 쓰는 것이었다.

이제는 미국내의 어느 곳에 있더라도 다른 도시의 시각이 몇 시라는 것을 정확히 알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간을 인위적으로 고치는 것이 좋다는 것을 미국 국민들에게 설득하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드디어 1883년 11월 18일 정오에 표준시간을 채택하기로 결정되어 미국 국민 전부가 시계를 표준시간에 맞추었다.

철로폭의 표준화 (Standard Gauge)

한국의 철로는 거의 대부분 처음부터 광궤로 건설되었지만 불과 그리 오래되지 않았던 시기까지 일부 지방철로는 협궤로 원래 건설되었던 까닭에 국철과 연결되지 못했던 것을 기억하는 독자들이 있으리라 생각된다. 미국 철로에도 똑같은 문제가 있었다.

1860년에 미국에는 350개의 철도회사들이 총연장 3만 마일의 철로를 가지고 있었으나 철로의 폭이6피트 짜리에서 4피트8.5인치에 이르는 것까지 열 한 개나되는 다른 철로 폭들이 있어서 철도의 통합은 쉽게 이루어질 수가 없었다.

장거리여행을 할 경우 중도에서 철도회사가 바뀌면 차를 바꿔 타야하고 화물도 일일이 옮겨 실어야 했었다. 예를 들어서 1861년에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의 찰스톤에서 필라델피아로 화물을 보내면 도중에 화물차에 여덟 번이나 바꿔 실어야 했다.


영국에서 조지 스티븐슨이 처음 증기기관차를 발명했을 때에 철로의폭을 4 feet 8 ½ inch 로 만들었는데, 그 폭은 당시 영국에서 쓰던 달구지 바퀴들의 폭이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영국에서 기차들을 수입해 왔던 까닭에 대부분의 철도회사들은 철로폭을 표준폭 (Standard Gauge) 인 4 feet 8 ½ inch 로 건설하였다.

1861년에 시작된 남북전쟁 중에 군인들과 군수물자를 신속하게 수송하기 위해서 많은 철로폭들이 표준폭으로 개조되었고 1869년에 대륙횡단 철도가 표준폭으로 건설되자 거의 모든 철도회사들이 철로폭을 표준폭으로 개조할 수밖에 없었다.

1880년에 이르러서는 전국 철로의80%가 표준폭 철로로 개조되었다. 문제는 남북전쟁 중 Confederate State 에 속했던 남부 주들의 철로폭들이 제 멋대로 이었던 것이 었으나 1886년 6월에 이르러서는 남부의 철로폭들도 전부 표준폭으로 개조되어 모든 열차가 전국을 다 왕래할 수 있도록 되었다.

Andrew Carnegie (1835-1919)

미국사람들 중에는 Carnegie 를 ‘카넥이’라고 발음하는 사람들도 있다. 흔히 우리나라 사람들이 발음하는 것처럼 “카”자에 액센트를 넣는 “카네기”도 옳지 않은 발음인 것같고 아마 “카아네기” 라고 발음하는 것이 무난하지 않을까 싶다.

우리 옛말에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써라” 는 말이 있다. 그러나 세도정치 시대를 제외하면 충실한 정승이 치부할 수는 없는 일이고 실제로 우리나라 정승들 중에 가난하고 억눌린 백성들을 위해서 가진 재산을 내놓을 정도로 후덕했던 사람도 없었던 까닭에 이 옛말은 다소 모순된 얘기이기는 하다.

Carnegie 는 “정승처럼 쓴” 여러 미국 거부들 중의 한 사람인데 정승 중에서도 영의정급 정도가 되었던 사람이라고 불러 주어야할 정도로 그의 모든 재산을 거의 다 사회에 환원한 사람이다. 그는 “한 인간의 생애는 세 시기로 구성되어야 한다” 면서 첫 1/3 은 공부를 하고 둘째 1/3 은 재산을 모으고 마지막 1/3 은 모은 재산을 좋은 목적을 위해 사회에 환원하는데 써야 한다고 “자신에게 주는 메모”에 일찌기 적어 놓았다고 한다. 실제로 그는 사망하기전 18년 동안 모은 재산의 사회환원에 전념하였다고 한다.

Carnegie 는 스코틀랜드의 한 빈곤한 가정에서 태어나 1848년에 부모를 따라 펜실베니아 주의 Allegheny 로 이민을 왔다. 아버지 윌리엄 과 어머니 마가렛은 교육을 받지 못한 하급노동자였다. 하도 가난하여서 일가족의 미국 이민여비를 외삼촌에게서 꾸어 가지고 왔다고 한다. 이민을 온 후에도 아버지의 수입이 신통치 않아서 어머니가 노동으로 가계를 도왔어야 했다.

당시 13세이었던 Carnegie 는 오자마자 방직공장에 말단 직원으로 들어가서 하루 12시간씩 엿새를 일하고 일주일에 1달러25센트을 받았다. 그는 공장에 다니면서 꾸준히 독학으로 공부를 하여서 계속 회사 안에서 진급을 하였다.

그는 같은 동네에 사는 Colonel James Anderson 이 400권의 장서가 있는 서재를 매주 토요일에 가난한 소년들에게 공개하자 그 서재에서 계속 폭넓은 분야의 책들을 빌려다 읽음으로써 다방면의 지식과 교양을 넓혀갔다. 그는 자기도 추후 부자가 되면 가난한 아이들을위해서 도서관을 세울 것이라고 결심하였다 한다.

그는 피츠버그에 있는 전신회사에 전신 Messenger boy 로 직장을 옮겼는데 각회사들의 주소와 사장들의 이름 등을 다 암기하여서 추후 그가 사업을 시작하였을때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또 그는 일년 안에 들어오는 전신의 소리만 듣고 수신 테이프를 보지도 않은채 바로 전신을 받아쓸 정도로 머리가 좋아서 곧 전신 operator 로 진급되었다.

Carnegie 는 20세때 부친이 사망한후 어머니와 같이 독신으로 살다가 어머니가 사망하자 51세에 30세인 부인 Louise Whitfield 와 결혼하여 외동딸을 낳았고 이름을 어머니의 이름을 따서 마가렛이라고 불렀다.

<<조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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