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이정훈 기자의 앵콜 클래식] 수필과 멘델스존

2016-03-10 (목) 02:4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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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 기자의 앵콜 클래식] 수필과 멘델스존
음악 이야기를 쓰다보면 한계에 부딪칠 때가 많다. 특히 음악이라는, 공중의 향연을 글이라는 그릇에 담아야한다는 일이 무척 부담스러울 때가 많다. 글은 모름지기 자연스러워야하는데, 남다른 소양을 갖춘 글솜씨도 아닌 주제에 자연스러운 글이란 말그대로 언감생심일 뿐이다. 좋은 수필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

수년 전에 작고하신 L 수필가는 수필이란 수채화같은 것이라고 했다. 진솔하고, 품위 있고, 위트(재미) 있고 특히 수필이란 발로 써야 한다는 지적이었다. 현장을 답사하고, 부지런히 발품을 팔아서 얻은 체험만큼 감동적인 것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음악이란 발품을 팔아 쓸 수도 없는 것이다. 부지런히 발로 쓰는 에세이… 이런류에 어울리는 음악 에세이란 없을 것이다. 그저 열심히 음악을 듣고, 그 느낌을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수밖에…

초심으로 돌아가 처음 글 쓰던 자세를 돌이켜보면, 그때는 다른건 몰라도 목에 힘주지 않고 글을 썼던 것 같다. 특히 멘델스존에 대한 글을 썼을 때가 제일 맘에 들었었다. 글도 쉽게 완성됐지만 특히 인생과 청춘을 비교한 부분이 좋았었다.‘행복이란 사람이 애쓴다고해서 붙잡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차라리 마음을 비우고 사노라면 행복은 마치 멘델스존의 음악‘종달새’처럼 어느날 갑자기 찾아오는 것은 아닐까…’ 당시 그렇게 적었는데, 지금도 그렇게 마음을 비우고 수필을 쓰고 있는지… 의문이다.


요즘 읽고 있는 것이 하루키의 수필집이다. 어느날 필이 꽂혀 자주 읽고 있는데 그것은 그의 수필이 기브스없이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 그의 글은 솔직하고 과장이 없다. 특히 자신이 왜 글장이로 성공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고백이 유머스러워 몇 번 읽었다. 고백인 즉슨, 하루키가 소설가가 되기 전에 재즈 바를 경영했었는데 찾아 오는 손님 중 10-15% 만이 다시 찾는 고객이 되었을 뿐 나머지는 아무리 열심히 가게를 운영해도 결코 다시 찾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결국 하루키는 그 10-15%의 고객만 가지고도 성공적인 재즈바를 운영할 수 있었는데, 그 때의 경험은 글을 쓸 때에도 (독자에 대한)반응에 관계없이 자신의 페이스를 유지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나의 경우는 과연 몇 퍼센트의 독자가 좋은 점수를 주고 있을까? 모르면 용감하다고, 아마도 하루키와 같은 배짱으로 지금까지 글을 써오지는 않았을까… 스스로 웃었다.

멘델스존(1809-1847)의 음악은 부담이 없다. 자연스러운 수채화… 화장기 없는 봄바람같다고나할까. 다가 갈 수록 달아나고 멈춰있으면 다가오는 그런 수줍은 처녀… 청춘과 낭만의 멘델스존의 음악만큼 수필과 닮은 음악도 없을 것이다. 조금 모호하기도 하고, ‘한여름밤의 꿈’처럼 환상적이기도 하다. 어디서 왔는지… 언제부터 멘델스존을 좋아하게 되었는지 또 왜 좋아하게 되었는지도 잘 모르겠다. 그저 듣고 있으면 좋고, 듣지 않는다고해서 앙탈을 부릴만큼 카리스마가 있는 것도 아니다.

어느 발레 공연 때 들려오던 교향곡 1번… 요즘처럼 비가 후둑후둑 떨어지는 날, FM에서 들려오던 조지 셀 지휘의‘핑갈의 동굴’ … 명동 필하모니(감상실)의 바이올린 협주곡… 그 황홀경들은 결코 다시 잡을 수 없는 것들이다. 오직 흘러간 추억… 그 가장자리에 자리한, 잡으려하면 날아가 버리는 노래의 날개일 뿐… 인생이 그렇고 음악이 그렇듯… 현실의 조건이 완벽하게 충족되어 있어도 꿈과 희망이 없으면 인생은 재미없다. 우리는 행복할 수도 있지만, 또 거울 속의 자신들의 모습처럼 항상 번듯한 모습으로 서 있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행복하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끝까지 책임지려는 스스로의 무리한 요구가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인생이란 현실의 근심 걱정보다는 나머지 30%는 신을 위하여… 가난한 마음으로 남겨 둘 필요가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마지막 반전을 믿는 믿음… 끝이 좋아야 다 좋다. 인생이 그렇고, 수필이 그렇고… 멘델스존의 음악이 그렇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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