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마추어가 보는 미국역사(90)노예 해방 이후의 미국의 흑인들②

2016-02-05 (금) 조태환
크게 작게
흑인노예들은 종전후 기대했던 농토분배도 거의 받지 못하였다. 버려진 고아와 비슷한 처지가 되었다고 할 수 있었다. 이때 생겨난 것이 sharecropping 라는 소작농 제도이었다. 백인이나 흑인 농업노동자 들이 지주로부터 농토를 임대하여 소작료를 내고 나머지는 노동자가 갖는 제도인데 ,종전후 소작료가 높고 몇 년 간 계속 흉년이 들어서 소작인들은 소작농으로 식량도 얻지 못하고 지주나 동네 가게에서 양식 살 돈을 꾸게 되어 벗어날 수 없는 빚쟁이로 허덕이게 되었다고 한다.

지주들은 환전이 쉬운 면화만을 심도록 하였던 까닭에 소작인들은 농작물을 먹을 수도 없었다. 이들 자유흑인들에 대한 남부 백인들의 태도는 양면성이 있었다. 남부주들을 패배시킨 것이 공화당이었던 까닭에 ,공화당은 남부주들의 배척을 받았고 자연히 복권을 시도하던 보수파 백인들은 민주당과 손을 잡게 되었다. 이들은 종전후의 흑인들이 이제는 참정권과 투표권도 가지고 있는 잠재적 정치 세력임을 깨닫게 되었다.

투표자의 손이 흰색이던지 검은색이던지는 상관 없는 일이고 숫자만 많으면 되는것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백인들이 흑인들을 유권자로써 인식하기 시작하였고, 흑인들을 민주당으로 끌어들이려는 움직임도 시작되었다. 그러나 백인들의 이와 같은 움직임은 별로 큰 성과를 보지는 못하였다. 도리어 흑인들의 정치의식을 깨워준 격이 되어서 , 흑인들이 주의회나 연방의회에 진출하기 시작하였고 흑인들이 자신들의 권익을 보호하는데 힘을 모으게 만들었다.


백인들은 회유정책과 정반대되는 방법도 동시에 시작하였다. 헌법상으로는 흑인을 포함한 모든 성인 남성들에게 투표권을 주어야만 하도록 되어 있으나 ,사실상의 투표는 흑인들 자신이 해야하는 것임을 이용한 잔꾀를 부리기 시작하였다. 투표를 하자면 우선 유권자 등록을 해야 하는데, 등록절차를 까다롭게 만들어 놓으면 흑인들이 투표를 할 수 없게 되는 것이었다. “문맹자나 토지가 전혀 없는 사람은 유권자로 등록할 수 없다” 라고 해놓으면 그 동네의 흑인들은 대부분 등록조차 할 수 없게 되는 것이었다. 각종 장애물을 건너 뛰어서 등록을 한 흑인이 있으면, 직간접적인 위협으로 투표권행사를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1950년대 말까지도 남부 몇 개 주에서 써왔던 흑인투표방해 관행 중의 하나는 투표소 보호라는 명목으로 투표소 근처에 백인경관을 배치해 두는 것이 었다. 경찰을 생리적으로 두려워하는 흑인들은 경관을 보면 투표를 포기하고 돌아가는 경우가 많은 것을 알고 써왔던 방법이었다. 이런 역경 속에서도 1877년부터 1900년까지 매 기의 연방하원에 단 한 번만 빼고는 매 번 여러 명의 흑인들이 연방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어 왔던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모든 남부 주들이 군정에서 벗어나고 다시 백인들에게 재장악되었던 1880년 부터 서서히 흑인차별이 비공식적으로 제도화 되어가기 시작하였다. 개정헌법에 따라 모든 학교들이 모든 국민들에게 개방되기는 하였으나, 사우스 캐롤라이나와 미시시피 를 제외하고는 처음부터 모든 남부주에서 흑백 인종별로 학교가 설립되었다. “Separate but equal” 이라는 궁색한 변명을 해가면서 ….. 학교차별이 위헌이라는 대법원판결은 1954년에야 “Brown vs. Board of Education” 을 통해서 나왔다.

그래도 종전 직후에는 기차, 호텔, 변소 기타의 공공시설들을 흑백이 공용으로 사용했는데 어느 새에 슬그머니 차별사용이 시작되었고, 곧 이어서 인종차별을 제도화하는 Jim Crow laws 라는 법들이 남부 주들에서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Jim Crow 는 흑인들을 지칭하는 말로써 , 흑인들을 법적으로 차별하도록 하는 법들을 Jim Crow Laws 라고 불렀다. 남부 쪽에서도 일부 진보적인 신문들은 Jin Crow Laws 들의 부당함을 비난하였으나 , 이런 법들은 모든 남부 주들에서 제정되었다.

이러한 법들의 제정이 인륜 도덕상 불의한 것임을 남부백인들도 알고는 있었지만, 백인들은 당시에 이런 법들이 필요하다고 느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노예해방 전에는 피부색갈 하나만으로도 양반과 상놈을 손쉽게 구분할 수 있었고 흑인과 백인과의 대인관계에서 서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것을 모두 알고 있었다.

노예해방 전에는 백인노예 소유주들은, 노예란 사역동물과 비슷한 재산으로만 간주하였던 까닭에 노예의 매매가 합법이었으며, 노예의 자녀는 자동적으로 노예주의 재산이 되었던 까닭에 어린아이들을 부모와 떼어서 팔았고 부부도 떼어서 따로 팔 수 있었다. 주인은 노예를 죽이는 것 이외에는 어떤 체벌을 가하거나 불구를 만들더라도 처벌을 받지 않았으며, 여자노예들은 노예주들의 성희롱의 대상이 되었으며, 노예주들 중에는 성욕충족을 위하여 어리고 미모인 혼혈 여자노예들을 구입하는 일들도 많았다고 한다.

신분 관계가 이의 없이 분명하다면 차라리 서로 눈치보아가며 살기가 편하다. 그런데 갑자기 노예해방이란 지진이 일어나고 보니 기존의 사회질서가 한꺼번에 무너져 버린 것이다. 모든 백인들 눈에는 고분고분 해왔던 검은양들이 하룻밤에 늑대로들 변한 것같은 위협을 느꼈을 것이다. 그들은 당연히 새 질서가 세워져야할 필요를 느꼈고, 피부색갈에 따른 온당한 처신을 법으로 규제할 필요를 느꼈을 것이다.


사실은 우리나라에서도 이와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조선이 망하면서 공식적으로는 다 없어진 ‘반상의 구별’이 식민왜정 시대에도 지방에서는 잠재적으로 살아 있었다. 대부분의 국민들이 상놈 (상민) 이었지만 상놈들 중에서도 무당이나 백정들은 천민들로 치부해서 보통 상놈들도 그들에겐 말을 놓아서 했고 , 결혼같은 것은 있을 수도 없는 것으로 쳐왔는데, 이런 악습이 해방후 1940년대말 까지도 지방에서는 성행하고 있었다. 머슴하던 사람은 돈을 모으면 양반이 되기도 하였으나 백정하던 사람들에게는 그런 일들이 있을 수 없었다. 노예해방은 흑인들을 종에서 머슴정도로 진급을 시켜준 것이기는 하였으나 , 흑인들이 하던 일들은 매한가지이였고 그대신 종신 직장보장과 연금제도가 없어진 것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었다.

미국흑인들의 칭호에 관한 흑인들의 sensitivity에 대해서 잠깐 언급하고자 한다. 우리 동포들 중에는 미국에서 꽤 오랫동안 살았던 사람들까지 흑인칭호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고, 아니 거의 insensitive 한 경우가 있는것을 종종 보았다. 더러는 인종 차별적인 생각을 갖거나 언사를 쓰는 것도 가끔 보았다. 흑인들과의 대화에서 항상 조심해야 될 일이 있다.

필자는 미국흑인들은 “흑인”을 호칭하는 모든 영어 단어들을 자기들을 비하해서 부르는 칭호라고 쉽게 오해한다고 생각한다. 원래는 흑인들을 “검다” 라는 의미의 Negro 라고 불렀으나 그 단어가 Niger 라고 변질되면서 비속어로 받아들여지게되자, 그 대신에 Black 이라는 단어가 한동안 유행했으나 그것도 비속어로 생각하는 흑인들이 많아졌고 American Black 나 Afro-American 이 유행하더니 요즘은 African American 이란 용어도 많이 쓰는 것 같다.

Colored, Darky, Uncle Tom, Jim Crow 등도 흑인들을 지칭할 때 쓰이는 말인데 , 이 단어들에는 다분히 흑인들을 비하하려는 고의성이 포함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고 생각 된다. 미국에서 태어나 이제는 중년이 다 된 딸아이의 견해를 물어봤더니 아마 African American 이란 호칭이 제일 무난할 것이라고 얘기해 주었는데, 필자는 용어보다는 말하는 사람의 “tone”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라고 생각된다.

연방대법원은1896년에 “Plessy vs. Ferguson” 이라는 판결에서 7대1로 공공 시설물 에서 “separate but equal” 로 차별하는 것은 위헌이 아니다 라고 남부 주들의 공공연한 인종차별을 허용해 주었다. 이 사건은 루이지애나 주에서 8분의1 흑인인 Homer A. Plessy 가 백인전용 1등칸 객차를 탔다고 강제 도중하차 된 후 25달러의 벌금을 부과한 John H. Ferguson 하급법원 판사의 판결을 위헌이라고 불복하면서 대법원까지 상고하였던 것이었는데, 당시의 대법원이 역사 역행적인 판결을 내렸던 것이다.

남북전쟁이 끝나고 100여 년 후인 1965년에 흑인 인권보호 법률들이 입법되기 까지에는 그 댓가로 끊임없이 학대 받아온 흑인들의 애통위에 백인 우월주의자에게 암살된 남부 조지아 주 출신 평화주의 인권운동가 Martin Luther King, Jr. 목사의 생명이 결국 지불되었으나 , 역시 남부 텍사스 주 출신 Lyndon B. Johnson 대통령의 각성과 정치적 영도가 동시에 있지 않았다면 이뤄지지 못하였을 것이다.

<조태환>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