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손 안에 든 새

2015-11-01 (일)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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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성혜 맥클린, VA

“언니, 손에 쥔 게 뭐야?”
“새.”
“무슨 새?”
“무슨 새라니? 보면 몰라? 참새야, 참새.” 조심스레 손을 조금 펴서 동생한테 손안에 든 새를 보여 줬다. “이거 봐. 털이 이렇게 보드랍고 따스해. 예쁘지? 만져 볼래? 꾹 누르지 말고 살짝 쓰다듬기만 해.”
“알았어. 신기하다. 근데 새가 왜 저렇게 할딱거려?”
“새 심장은 빨리 뛰니까.”
“겁나서 그러나? 저렇게 뛰다간 숨 넘어가겠다.”
“걱정 마. 개도 숨 쉬는 거 보면 헐떡헐떡 빨리 뛰잖아? 새는 더해. 훨씬 작으니까.”
“언니, 근데 새를 어떻게 하려고 그래?”
“어떻게 하긴? 키워야지.”
“새장도 없이? 날아가게 놔 주지.”
“새장 없어도 돼. 소쿠리 엎어놓고 그 안에 넣은 다음 쌀 몇 알 뿌려주면 잘 살 거야.”
피난시절. 먹을 것, 입을 것이 귀한 시절이긴 했지만 아이는 아이인지라 애완동물(?) 하나 가지고 싶다는 간절한 꿈이 있었나 보다. 어쩌다 내 손에 참새 한 마리가 생겼는데(너무 소시적 일이라 어떻게 새를 손에 넣게 되었는지는 기억에 없다.) 그 새를 애완동물로 키울 엉뚱한 생각을 했던 것이다. 어린 마음에 그럴듯한 꿈은 꿈이었다고 할 수도 있겠지….
내 소견머리로는(당시 9살 정도였을 게다.) 그림같이 멋진 새장을 구해 주고 싶었겠지만 그럴 방도가 없으므로 생각해 낸 것이 소쿠리를 뒤집어 놓고 그 안에다 먹을 것을 넣어 주면 되겠다는 철없고 순진한 착상이었다.
그런데 내 꿈이나 희망 사항은 아랑곳없이 참새는 쌀 한 톨 입에 넣지 않고 결사적으로 단식투쟁(?) 하기로 작심한 듯 입을 꽉 다물고만 있었다. 조그만 것이 동네방네 바지런히 날아다니며 먹이 찾느라 애쓰기 보다는 소쿠리 안에 있으면 먹고 살 것은 보장할 터인데도 말이다. 쯧쯧! 저러니 새대가리란 소리 듣지….
새를 애완동물로 키우겠다는 내 원대한 꿈과는 관계없이 그 다음 날 새는 죽었다. 죽은 새는 따스하지도 않고, 할딱거리지도 않고, 털의 윤기도 없었다. 뻣뻣이 굳은 모습이 마른 나뭇가지나 진배없다. 호미로 흙을 파고 새를 묻었다. 나뭇가지 두 쪽하고 지푸라기 구해 조그만 십자가 만들어 꾹 눌러 꽂아 줬다. 천당 가라고. 그리고 우두커니 쪼그리고 한참 앉아 있었다.
“이놈아, 비싼 돈 내고 등록했는데 가라는 학원은 안 가고 싸 돌아다니기만 하면 도대체 어쩔 셈이냐? 대학 안 가고 목욕탕서 때밀이로 일생 보내려고 맘 잡았냐?” 자신이 이루지 못했던 꿈을 자식 통해 얻어 무슨 큰 영광(?) 누릴 셈인지 아이를 달달 볶아대는 부모. 우리 주변에 흔하디 흔하다. 나 역시 죄 없다고 큰소리칠 자격 없다.
마누라를, 혹은 남편을 내 마음대로 손 안에 넣고 주무르고 싶어 지지고, 볶고, 싸우고, 땅치고, 통곡하고, 한숨짓는, 사람들 부지기수다. 나 역시 결백하단 소리 못한다.
문득문득 내 생각이 부메랑처럼 내 손을 빠져 날아가 피난 시절, 그늘진 교회 옆 축축한 땅, 거기 묻은 참새를 더듬고 돌아온다.
어쩌면 ‘넌 내 것이야. 넌 내 손 속에 있어야 해. 넌 나만의 것이야.’ 따위의 아집을 내 속에서 틈틈이 보기 때문은 아닐까? 원하는 대로 날고, 고플 때 먹고, 잘 때 자고, 그렇게 사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자꾸 잊기 때문은 아닐까?
새장 속의 새는 노래 부르게 마련이라고 한다.
손바닥 안의 새는 죽게 마련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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