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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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한잔의 초대/ 퀸즈YWCA 수공예반 위원장 노혜미

2015-09-24 (목)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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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깨도 무겁고 눈도 침침하지만...바느질이 좋은 걸

Y 수공예반 창립멤버로 37년간 자리지켜
일년내내 준비한 작품들 매년 바자회 일등공신
Y 회장.늘푸른대학 교장.합창단 등 두루 거쳐

YWCA(The Young Women’s Christian Association of Queens)는 한국뿐 아니라 미국에서도 가장 유명한 여성기독교단체이다. 특히 퀸즈YWCA는 창립부터 지금까지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한인여성들의 지적 갈등을 달래주고 기쁨을 주고 있다. 노혜미 퀸즈YWCA 수공예반 위원장을 만났다.

▲수공예반 위원장 35년차
"미국에 이민 온 1978년, 막내아들이 초등학교에서 수학을 공부하는데 한국과 달라 엄마가 가르칠 수가 없었다. 그때 YWCA 방과후 학교 모집 신문광고를 보고 아이와 함께 Y회원으로 등록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수공예반과의 질기고도 아름다운 인연이 이어진 것은.
1978년 뉴욕한인YWCA가 창립된 해 수공예반이 개강했고 노혜미는 수공예반 위원으로 들어갔다. 최희숙 위원장에 이어 80년초부터 위원장을 맡은 것이 오늘에 이르렀다.

Y연례바자회의 일등공신은 수공예반이다. 바자를 위해 1년동안 작품을 준비한다. 가방, 조끼와 드레스, 식탁 러너와 매트, 방석, 앞치마와 액자, 큰이불, 아기이불 등등 수십 가지 생활용품을 손바느질과 미싱으로 척척 만들어내 바자회에서 판매한다. 기금은 청소년과 노인 프로그램에 사용된다. 10여명의 한인여성들이 매주 월요일 오전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플러싱 Y강당에 모여 바느질을 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와르르르 웃으며 정을 나누고 있다.

“수공예반에 현재 46세 여성이 가장 어리고 가장 연장자는 84세이다. 예전에는 박남길 전 회장이 사위 정명훈씨 덕분에 세계 각국의 예쁜 수공예 샘플을 많이 사왔다. ‘이것 한번 만들어봐’ 하면서 우리에게 주면 어떤 어려운 샘플이라도 머리를 맞대고 그대로 해내었다. ”

그런데 요즘 그는 바느질 시간이 줄어들어 안타깝다고 한다. “매일 보통 8시간씩 바느질을 했다. 얼마 전부터 어깨가 아파서 물리 치료 받으러 다니고 있다. 요즘은 하루 세 시간밖에 못한다. ”

그동안 식사 후에는 바로 2층 작업실로 올라가 만들어낸 작품이 수천점이지만 현재 본인이 가지고 있는 것은 거의 없다. 모두 바자회에서 판매되었다.

노혜미는 퀸즈YWCA 회장, 늘푸른대학 교장, 어머니반 합창단, 늘푸른대학 합창단을 두루 거치며 한국을 비롯한 해외공연, 뉴욕시 문화행사 등에 출연, 민간문화사절단 역할을 했다.

▲1978년 뉴욕한인YWCA 창립
“손자손녀한테는 이불을 만들어주었으나 정작 내 아이들한테는 못해주었다. 얼마 전 결혼 20주년이 된 큰 딸한테 처음으로 이불을, 그것도 만들어놓은 이불 중 하나를 주었더니 아이가 울더라.”


그는 그렇게 YWCA 올드타이머로, 지금도 크고 작은 행사에 꾸준히 자원봉사하고 있다. 1978년 5월 6일 한인YWCA는 한국 Y출신 김명자, 김영자, 김은순, 서희전, 이경애, 이정숙, 우옥임 장순옥, 홍인숙 등 9명에 의해 창립됐다. 초대회장 김명자 초대총무 홍인숙으로 출발하여 맞벌이 부부의 어려운 가정을 지켜주기 위해 단칸방에서 어린이 방과후 학교를 시작했다. 점차 노인문제, 청소년 문제 등을 다루기 시작했고 1993년 자체건물을 완공하여 퀸즈YWCA로 이름을 바꾸었고 이후 독립기관으로 발전했다.

1995년 Y리더인 홍인숙 총무, 권숙영 회장, 노혜미 부회장은 뉴욕시 봉사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21년간 퀸즈YWCA를 위해 헌신한 홍인숙 총무는 1999년 은퇴했고 현재 회장 크리스틴 초이, 사무총장 헬렌 김이 활동 중이다.

▲ “일복 터졌다”
“오십견이 와서 엄청 아픈데 홍총무님이 우리집에 와서 직접 병원에 데리고 가고 데려다주며 치료를 받게 했다. 한약 다섯재를 먹을 정도로 몇 달간 아팠다. 회복기에 들어서자 회장을 하라고 했다. 나는 인맥도, 가방끈도 짧아 못한다고 하자 그냥 엄마같이 포근한 이미지면 된다고 했다.”
30명의 이사가 모인 이사회에서도 적극 노혜미를 추천했지만 계속 거절하는 아내를 남편 한우갑씨가 ‘해보다가 못하면 내려놓으라’고 권했다.

“2002년 9월~2004년 7월까지 14대 회장을 하던 때 퀸즈YWCA25주년 기념행사에다, 우리가 땅만 사고 건물은 시티Y에서 지어 1993년 완공된 건물을 인수하라고 했다. 얼마나 많은 서류에 사인을 해야 하는 지, 부회장이던 한정숙, 민금복씨가 많이 도와주었다.”

또한 회장 임기동안 만찬, 바자회 등 정기적인 일 외에 조영남콘서트, 정명훈?정경화?한동일 등의 한국음악가초청콘서트, 이명희?정옥현 사진전 등 일이 쏟아졌다. 그러자 “안한다더니 일복 터졌다.”고 다들 웃었다.지금은 바자회에서 만두를 팔지 않지만 정갈하고 맛있는 ‘그 유명한 Y만두’는 당일 아침부터 품절될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

“보통 한달 전부터 만두 빚을 준비를 한다. 이사들과 노인대학 자원봉사자들이 밤새 수다를 떨며 강당에 둘러앉아 5만~6만개의 만두를 빚어 냉장고마다 꽉꽉 채워놓았었다. ”

현재 퀸즈YWCA는 한인 및 타인종 대상으로 검정고시반, 푸드스탬프, 서민아파트 및 메디케어, 홈케어 서비스 훈련프로그램 등을 제공한다. 동양화반, 서예반, 장구반 등 다양한 문화활동반도 열린다.

노혜미는 1940년 서울 아현동에서 딸 다섯, 아들 하나인 6남매중 둘째로 태어났고 초등학교에 가자마자 6.25가 나며 부산으로 피난 갔다. 그곳에서 창덕여중을 다녔고 이후 서울로 올라간 창덕여중과 여고를 졸업했다. 그때 만난 친구들이 평생 친구가 되었다.

그는 박수근 화백의 그림을 좋아하여 그림본을 떠서 수를 놓아 액자를 많이 만든다. 친구들은 지금도 서울에서 박수근 전시회가 열리면 도록을 사서 뉴욕으로 붙여준다.

아버지는 요즘 가장 뜨는 직업인 미국대사관의 ‘셰프’라서 정동사택에서 살았다. 학교 졸업 후 외국계 쉬핑 회사에 다니는 한우갑씨와 결혼, 2남1녀를 낳아 키우며 부산에서 17년을 살았다.
78년 5월 미국으로 이민 온 지 6개월 후 남편은 비어 도매상(East Beer Center, INC)을 차렸고 지금은 아들 둘이 합세한 가족 비즈니스가 되었다.

▲끝없는 봉사
“공부를 더하고 싶은데 대학등록금이 없어 대학을 못갔다. 그것이 한이 되어 컬럼비아 대학원에 들어간 큰외손녀에게 말했다. 누구든 대학원에 가는 손자손녀 등록금은 할머니가 대준다고 했다.”

건축을 전공한 큰아들, 항공사에 다니는 큰딸, 그리고 헌터칼리지에서 음악을 전공한 막내아들 한성준(예명)은 4년간 한국에서 가수활동을 하며 영화 ‘클래식’의 타이틀곡 ‘사랑하면 할수록’을 불러 큰 인기를 끌었었다. 얼마전 방영된 드라마 ‘조강지처 클럽’, ‘작은아씨들’에서도 아들이 부른 노래가 나왔다.

“빨리 어깨가 나아야 바느질을 더 할 수 있을텐데...”
마사지를 받느라 팔이 얼룩덜룩하면서도 그의 마음은 여전히 바쁘다. 오는 가을 바자회에 더 많고 더 멋진 작품을 보여주고 싶은 것.

언제 보아도 단아한 모습에 따뜻하게 반겨주는 노혜미, 그는 손바느질이 “지루하지 않고 여전히 재미있다”고 한다. 일단 바늘을 잡으면 세상걱정, 온갖시름을 다 잊어버리는 것이 바느질의 장점이다. “대다수 수공예 회원이 눈이 침침하고 손바느질이 힘든 이민 1세지만 열정만은 대단하다. 바느질이나 뜨개질 등 수공예에 취미 있는 여성들은 누구든지 들어오세요. 그래서 내 자리를 맡아주세요.”하고 활짝 웃는다.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역사 깊은, 여성을 위한 여성에 의한 단체는 이렇게 여성들의 끝없는 봉사위에 서있다는 것을 확인한 순간이었다.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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