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대북 확성기 방송의 괴력

2015-09-03 (목)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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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에서 북한의 지뢰와 포격 도발로 야기된 무력 충돌 위기는 남북 고위 당국자간의 무박 4일간 피를 말리는 협상을 통해 일단 완화되었다. 6개 항으로 된 남북공동 보도문을 도출하는데 어느 쪽이 더 잘 했는지, 어느 쪽이 더 유리하게 되었는지를 평가하는 것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이번 사태를 통해 한가지 분명하게 드러난 사실은 북한의 집권층, 특히 김정은 위원장이 대북 확성기 방송에 지나치게 민감한 반응을 보이며 최측근인 황병서와 김양건을 비롯해 대남 협상전문가들을 판문점 남쪽 평화의 집으로 내려 보내 결국 ‘방송중단’이라는 목적을 달성했다는 사실이다. 8월 하순에 목함 지뢰 사건과 북측 포격에 뒤이어 남측에서 대응조치로 확성기 방송을 재개하기로 결정했을 때만해도 어떤 사람들은 ‘대응책이라고 내 놓은 것이 고작 이것인가?’라고 비아냥댔다. 하지만 ‘대북 확성기 방송’이야 말로 김씨 왕조 집권 층이 가장 두려워하는 아킬레스건 임이 이번 사건을 통해 여실히 드러났다. 그들은 오로지 ‘확성기 방송중단’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전력투구(all-in) 했다는 게 협상 후일담으로 전해지고 있다.

왜 그들은 확성기 방송에 이처럼 떨고 있을까? 체제를 유지하는데 큰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다. 북한 군인과 주민은 몇 십 년 동안 정부가 펼친 허위선전에 세뇌되어 자기들이 세상에서 부러움 없이 잘 사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이 환상을 방송이 깨뜨리고 있는 것이다. 자유민주주의의 우월성, 남쪽 동네의 잘 사는 모습, 북한사회의 내부 실상 등 북한 내에서 접할 수 없는 정보에다 남한의 젊은 세대들이 즐기는 팝송들이 장마당 세대로 바뀐 휴전선 일대 북한병사들의 마음을 파고든다. 그들이 제대 후 고향에 돌아가서 북한의 현 실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 평양 지도자들은 걱정을 안 할 수 없다. 대륙간 탄도 미사일로 미국 본토를 공격할 수 있다고 큰 소리 치고 핵 무기 보유를 자랑하는 북한이 고작 유효 전파 거리 12마일 안팎의 휴전선 일대 확성기 방송을 중단시키기 위해 ‘최고존엄’의 최 측근들까지 내려 보내 남측 대표들과 며칠 밤을 새우며 비지땀을 흘리게 한 것은 한반도의 비극인 동시에 21세기의 코미디가 아닐 수 없다.

남쪽은 이번 협상에서 통일을 앞당길 수 있는 좋은 수단 한 가지를 포기했다. 하지만 확성기 방송 보다 더 효과적이고 덜 위험한 대안이 있다. 북한 전역에 눈에 보이지 않게 울려 퍼지는 중파, 단파, FM 라디오 방송이다. 이번 사건을 통해 대북방송의 괴력(怪力)이 증명되었으니 한국정부는 서둘러 그 출력을 늘리고 프로그램을 강화해서 북한 주민들에게 진실을 알리고 남북한 주민들 간의 소통을 늘려야 한다. 마지막 동독의 총리 로타 드 메지에르 씨는 최근 한국의 한 언론 인터뷰에서 “1989년 동독 주민들이 개혁을 요구하는 평화적 시위를 벌이지 않았다면 결코 베를린 장벽은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다. 장벽이 무너지기 전 까지 누구도 이처럼 앞당겨 통일이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독일 통일을 앞당긴 일등공신 중 하나가 바로 방송이었다. 독일의 경우 서독과 서방세계의 TV방송이 큰 역할을 했다면 한반도의 경우는 라디오가 통일을 앞당기는 일등공신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라디오를 통해 북한 주민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북돋아 주고 그들도 남쪽 동네 사람들처럼 자유롭고 풍요롭게 살 수 있는 날이 다가 온다는 메시지를 쉬지 않고 보낸다면 몇 십 년 동안 세뇌공작에 찌들은 북쪽 동네 사람들도 마음이 움직일 것이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김씨 왕조 지도층이 대북방송의 괴력에 떨고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한인섭 전 VOA, RFA 한국어방송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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