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사랑의 빚

2015-08-26 (수) 12:00:00
크게 작게

▶ 한표욱 프로그램 디렉터

지난 크리스마스 때 아이들에게 조금 특별한 선물로 평소에 아이들이 갖고 싶어 하던 장난감이며 액세서리 등을 사고 싶은 대로 살 수 있게 해 봤다. 평소에 잘 못 해줬던 미안함을 한 방에 날려버리고 동시에 엄마보다 멋진 아빠가 되보고 싶은 심산이었다. 돈을 잘 모르는 아이들은 여기 저기 돌아다니며 바구니 한 가득 담아왔고, 돈을 잘 알고 있는 현명한 아내가 일차 걸러주어, 아이들도 만족하고 집안 살림에도 큰 무리 없는 선에서 선물들을 구입했다. 예상대로 아이들이 신나했다. 그런데 거기까지였다. 그 정도였다. 아이들은 여전히 엄마를 더 좋아했고. 사고 싶은 대로 샀던 장난감들은 며칠 지나지 않아 함부로 널부러져 있었다. 오산이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첫째, 사랑이 그렇게 한 번에 채워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매일 씻겨주고 맛있는 음식 해주고 책 읽어주며 놀아주는 엄마의 사랑을 곧 죽어도 한 번에 채울 수는 없었다. 알고는 있었다. 혹시나 했던 거지. 둘째, 장난감은 도구일 뿐 그 자체가 아이들에게 기쁨을 줄 수 없다는 점이다. 큰 맘 먹고 산 비싼 장난감보다 아빠랑 같이 만든 종이 신발이랑 종이 목걸이를 더 좋아하며 더 소중히 여긴다. 뭘 사줘도 같이 놀아주지 않으면 요즘 말로 말짱 ‘꽝’이다.
아이들이랑 함께 하는 시간이 절대로 싫은 건 아니지만 살다보니 자꾸 뒤로 미뤄진다. 잠들기 전에 같이 누워있어 달라는 일곱 살 난 첫째 아이의 부탁도, 침대에서 점프점프 시켜달라는 세 살 된 애교쟁이 둘째 딸의 부탁도 5분 이상 못 들어준다. 자꾸 내일 해 준다고 미룬다. 사실 아주 급한 것도 없는데 말이다. 사랑이 돈이라면. 난 아이들에게 갚지도 않고 미루기만 하는 구제 불가능한 신용불량자인 셈이다.
그래서 그 때 그 일 이후로 노력을 하고 있다. 아이들과의 관계에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지 않고. 은행에 빚을 갚는 빚쟁이의 마음으로 일정 시간을 아이들에게 갚았다. 아직도 갚을 빚이 많아 어떻게 갚을 지 고민이 많지만. 다행인 건 점점 빚 갚는 일이 재미있어진다. 잘된 일이다.
한국에서는 매년 5월이면 ‘가족의 달’이라 하여 “사랑”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방영한다. 거기에서는 일반적으로 당연시 여기는 그래서 함부로 대하는 것들을 잃었거나 잃어가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평생 함께 할 것 같던 아내가 아프고, 건강했던 남편이 아프고, 바뻐서 피곤하다며 놀아주지 못했던 아이들이 아파한다. 볼 때마다 내가 언제든 받은 사랑을 돌려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가족 간의 삶이 사실은 얼마나 제한적인 것인지 알게 된다. 내가 크게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준다. 그래서 기회 있을 때마다 본다. 건강한 아내가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피곤한 아빠를 아랑곳하지 않고 귀찮게 하는 아이들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머리에 각인이 되라고, 그래서 실수하지 말라고.
감사하게도 지난 6월 한인 복지센터에서 주최한 행복 가족캠프에 직원이자 참가자로 참여할 수 있었고, 덕분에 맨날 ‘다음에 해 준다’며 핑계거리만 찾던 아빠를 예쁘게 기다려 준 아이들과 정말 소중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어린애라고만 생각했던 첫째 아이의 생각도 듣고, 뭘 좋아하고, 뭘 잘하는지, 또 뭘 하고 싶은지, 시시콜콜한 것까지 알게 되었다. 아이들이랑은 지금도 가끔 그 때 배웠던 놀이를 하며 좋은 아빠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그럼에도 갈 길이 멀게만 보인다. 좋은 아빠가 된다는 것이 말처럼, 생각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할 수만 있다면, 가능하다면, 상위 1% 훌륭한 아버지들을 모셔다 놓고 그 분들이 어떤 목표를 가지고 아이들을 키우셨는지 듣고 배우고 싶다. 그래서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사는, 자녀들에게 사랑의 빚을 지지 않고 사는, 자식들에게 만큼은 최고인 존경받는 아빠가 되는 법을 배우고 싶다. 조그만 한 어린 딸들이 부주의한 아빠 때문에 감기에 걸려 약 먹고 골골거리며 자고 있다. 여전히 사랑의 빚에 허덕이는 아빠를 더 미안하게 만든다. 오늘 퇴근 길에는 아이들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이라도 사들고 가야겠다.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