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세미티로 캠핑을 다녀왔다.
해마다 몇번씩 그곳을 가는데 무엇이든 알수록 더 사랑한다고 가면 갈수록 그곳이 더욱 아름답다.
추운 겨울을 나고 여리디 여린 가지들이 뽀오얀 물기를 머금고 부드럽게 기지개를 펴는 봄의 모습도 경이롭고 시원스레 쏟아지는여름의 계곡, 소슬한 바람에 잎새를 떨구며 빈 가지를 드러내는가을의 스산함도 좋다.
한겨울, 하아얀 눈 덮힌 그곳은온 세상을 품어주는듯한 고즈넉함이 있어 그 또한 애틋하다. 요세미티에 맛들이고는 동네의 고만고만한 캠핑장들이 눈에 차지 않는다.
별 다섯 호텔에 익은 몸이 추레한 모텔방을 마다하는것 같다. 요세미티가 고작 4시간 떨어져 있다는건 내 삶에얼마나 큰 행운인지 모른다. 작년,몸이 죽어라고 협력을 거부해 슬퍼하며 거르고 올해는 벼르다 기여코 또 갈수가 있었다.
떠나기 전날 모든 짐을 대충 꾸려놓고 자리에 눕자 손자는 팔딱 팔딱 뒤척이며 잠을 못이룬다. 어렸을 때소풍전날 잠못 이루던 흥분을 이제 내 손자가 겪는다.
어린 애들의 내일을 향한 부푼마음은 고목같은 노인의 맘에 미소를 전해 준다. 예전엔 어디를가든 본전을 뽑는 것이 크나큰목표였으나 이제는 어딜가도 바람따라 구름따라 주위를 찬찬히음미하고 한편으론 몸의 요구, 마음의 내킴에 귀기울이며 노닐듯한다.
사슴은 텐트 옆까지 찾아와 조용한 몸짓으로 나뭇잎새를뜯고 아이들은 맑은 하늘을 올려보며 공연히 소리를 지르고 방방뛴다.
가뭄이 심한 탓에 계곡의 물이 줄고 흔히 보이던 송어떼도 안보인다. 그러나 함께 야외에 있는것만으로도 흥분되어 이리저리뛰는 아이들에게 행여 위험한 일이 있을까 조마조마해 하는 어른들의 입장에선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손에 들고간 릴케의 편지를 다시 읽는다. 이즈음, 이메일로도 텍스트로도 심에 안차 카톡이라는걸 개발해서 한 단어 한 단어를주고 받으며 그것도 교류라고, 소통이라고 하는 시대의 숨찬 호흡.
말 배우는 어린애들의 혀 짧은소리 같은 말을 대화라고 나누는세대에 가슴 답답함을 느끼면서그 시절, 이토록 깊이있는 편지를,일면식 한번 없는 독자에게 이토록 간곡한 진심을 담아 그 긴 편지를 쓸 수 있었던 릴케에게 또다시 감동한다.
그의 편지를 받은 젊은 시인은얼마나 행복했을까. 일생동안 나는 단 한번이라도 그런 편지를 누구에게 쓴적이 있던가, 받아본 적이 있던가. 그리고 그 깊이있는 내용.
깊은 고독속으로 들어가자신의 벌거벗은 내면을정직하게 보기를 권하는치열한 성찰.
자연과 그리고 삶의 곳곳에서 스치는 사소하고 소박한 것을 소중하게 보도록 권하는 삶에의 진정성,성실하게 오래 오래 기다려줄수있는 마음이 이루어내는 값짐을이토록 정갈한 언어로 담아 보낼수 있을까. 사람이 만든 많은 것들은 세월속에 먼지되어 스러진다. 한 때 군중의 박수를 받고 잘나가던 글이 한 세기가 넘어가기도 전에 잊혀지는 일이 정말 많다.
그러나 릴케의 편지는 셀수도없는 많은 작가 지망생들의 펜을통해 오랜 세월 동안 수도 없이많은 version 으로 되쓰여졌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읽고 감동받는수많은 글들의 태동이 어쩌면 그의 편지에 뿌리 닿아있는 게 적지 않을 것이다. 물론 사람의 생각이란 게 거기에서 거기인 까닭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주위의 흔한 명상서적과 신앙서적, 그리고 기도시와 에세이에서 그의 편지에 담겨진 글망울이 느껴진다. 하다못해 토마스머턴에서도 홉킨스같은 대가의 글에서 조차. 모든 진리는 결국 하나인 것이 아닐런지. 하지만같은 의미의 말도 단어의 선택과문장의 조합에 따라 절묘히 다른감칠 맛을 낸다.
그리고 자연과 시인은 함께 기대어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