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브로드웨이 상권시절 우리를 ‘코이시’라 불렀지”
500만달러, 1,000만달러 수출의 탑 황금 트로피를 앞에 놓고 자리를 함께 한 최희용·이상옥 부부
젊은 날 새벽부터 일어나 하루종일 일하던 기억밖에 안나
가발 패들러로 시작해 1천만불 수출탑 황금트로피 까지
장사 초보들에 물건.장소 제공 한인상인들의 구심점 역할
1970년대 중반~2,000년도에 전성기를 이룬 브로드웨이 한인상가는 미 주류사회에 ‘근면성실한 한국인’이란 이미지를 심어주었다. 브로드웨이 그 중심에 최희용 전 뉴욕한인경제인협회 회장이 있다.
▲‘코이쉬’
70년대~80년대 브로드웨이 거리. 어둠이 채 걷히지 않은 시간, 도매상들이 문 여는 셔터 소리가 새벽 공기를 가른다. 곧이어 소매업자들의 바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브로드웨이 26가부터 33가까지 5애비뉴와 6애비뉴 사이의 4각형 지역에 가방, 잡화, 보석, 모자, 가발 등 도매상 수백 개가 일대 번화가를 이루었고 최희용, 김동빈, 유득종, 정수일, 조병태, 변원수, 김재설 등 경제인협회 초창기 멤버들이 그 주인이었다.
한인도매상들이 새벽 7시에 문을 열어 늦게까지 일하니 점차 인도인도, 유대인도 물러났다. 유대인은 전자제품으로, 인도인은 옷장사로 돌아섰다. “유대인들은 우리를 코이쉬(korean-Jewish)라 불렀다. 71~74년 가발경기의 전성기때 브로드웨이 1125번지는 가발빌딩으로 불릴 정도로 원래 한산하던 이 일대가 한인들로 인해 번화가가 되었다.”
최희용은 72년 친구 최형기와 유대인 가발회사 패들러 KPC(Korea product company)를 설립, 브로드웨이 28가에 가게 렌트를 했다. 이것이 브로드웨이 상가 산파 역할을 하게 된 가발 패들러상이다. 순식간에 14가, 34가, 브루클린 애비뉴 지역 등 소형점포 8개, 노점상 10여개로 판매망이 늘어났다.
최희용은 혼자 잘 살지 않았다. 가발 비즈니스를 하려는 한인이 가게를 얻고 테이블을 사는 비용(보통 1,000~2,000달러)은 물론 물건도 외상으로 주었다. 그때 맨몸으로 장소와 물건을 제공받은 한인은 100명 정도, 생전 장사를 안해본 사람도 자신감을 갖고 뛰어들었다. 다른 사람도 살게 만들어준 그의 배려가 오늘날까지 한인들의 존경을 받게 만들었다.
최희용은 74년 6월 독립, 가발판매로 얻은 자본과 경험을 바탕으로 나스(NAS, National Asia Surprise) 임포트(Import Corp)를 설립했다. 한국산 가방은 품질과 가격면에서 충분한 경쟁력을 갖췄고 마침 새로 개발되어 공급되는 PVC원료 인조가죽 가방이 힛트를 쳤다.
1978년 5월 브로드웨이 상인번영회가 발족되며 제1대 김영철 제2대 김혁규에 이어 최희용은 제3대 회장이 되었다. 이때 단체 이름을 뉴욕한인경제인협회로 바꾸었다.
“브로드웨이에 수백 개의 한인 가게가 있었는데 현재는 뷰티서플라이업 등 20~30명이 남아있다. 맨하탄 6애비뉴와 뉴저지 포트리 쪽으로 많이 옮겨갔다.”
▲지참금 400달러
최희용은 1937년 9월29일 충청북도 충주군 살미면에서 태어났다. 새벽부터 일어나 논으로 나가는 아버지를 보며 자라 어려서부터 부지런함이 몸에 배었다. 살미초등학교와 충주사범 병설중학교를 졸업했는데 6.25 전쟁후 집안은 빈농으로 내려앉았다. 고향마을도 충주호 건설로 수몰지역이 되었다.
1953년 서울로 올라와 낙양고등학교(중대부고) 1학년때 영등포 철길 옆 수송담당 미군부대의 보초로 취직했다. 낮에는 미군이 밤에는 한국학생 2명이 보초를 서는데 오후 12시부터 다음날 새벽 6시까지 꼬박 밤을 새워야했다. 이때 어떤 일이 닥쳐도 용기가 나고 어려울 것 없다는 자신감이 생겼다.그후 미 야전전병원 식당, 부대 세탁담당 아주머니집 가정교사로 학비를 벌었고 성균관대학 졸업 후인 63년 관광공사에 입사, 7년간 근무하며 영어에 자신감이 생겼다.
63년 이상옥과 결혼한 후 1969년 미국으로 이민 왔다. ‘아이들을 미국에서 교육시키고 싶다’는 바람이었다. 그때 한국정부가 허락한 가족 1인당 지참금이 100달러, 4인가족 법정 지참금 400달러 외에 약간의 정착금을 갖고 ‘젊으니까 노동으로라도 살 수 있다’는 각오였다. 처음 시애틀로 가서 5개월간 식당에서 일했고 1970년 3월 뉴욕으로 왔다.
▲깃대 지키기
최희용은 가장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초창기를 잊지 않는다.
“가발 패들러는 유대사람들이 하던 행상 방식으로 가게 바깥 한귀퉁이만 렌트하여 소위 ‘깃대’라고 불리는 가발걸이에 플라스틱 헤드를 걸고 그 위에 수십개의 가발을 쭉 걸어놓고 하루종일 그 앞에 서서 물건을 파는 것이다. 72년 2월과 3월 날씨가 얼마나 추운지. 혼자 판매대 앞에 서있자니 밥을 먹으러 갈 수도 없어 핫도그로 끼니를 때우고 화장실을 못가니 물을 마실 수도 없었다. 가발 박스에서 색깔 찾는다고 잠시 눈돌린 도둑을 맞고 깃대에는 플라스틱 흰 머리만 남는 경우가 빈번했다.”
나중에는 동네 건달을 불러 용돈을 주고 잘 대해주니 그가 도둑을 지켜줬다.
이후, 사업이 번창하며 그는 한국정부로부터 상도 많이 받았다. 매년 3,000만-4,000만 달러어치 한국산 가방을 수입하고 뉴욕, 필라, 워싱턴, 볼티모어, 남미 지역에 판매하자 1987년 11월 30일 제24회 무역의 날 ‘5백만불 수출의 탑’, 1989년 11월 30일 제26회 무역의 날 ‘1천만불 수출의 탑’ 황금 트로피를 수상한 것이다.
“그때 뭐가 그리 바쁜지, 대통령이 수여하는 시상식에 갈 엄두도 못내고 다른 직원이 받아왔다”는 최희용, 그의 젊은 날은 새벽부터 일어나 하루종일 일에 빠져있던 기억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한인사회 봉사 참여
최희용은 정치인 후원에도 앞장섰다. 91년 미하원 아시아태평양소위원회 위원장 스테판 솔라즈 의원 초청 후원행사, 89년부터 루돌프 줄리아니 정치자금을 모금하여 94년 뉴욕시장 선거 승리에 일조했다. 그외 뉴욕주립 스토니브룩대 한국어 과정 설치 총장자문위원으로 선임되어 학교당국과 한인사회간 긴밀한 협조를 했고 1986년 BNB 은행 창립이사, 2004년 제7대 이사장 1986~87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뉴욕협의회 3기 회장을 지냈고 충청북도 국제자문관도 맡았다.
“83년 로즐린 집을 팔고 맨하탄 아파트로 들어와 살고 있다. 일주일에 한두번 골프를 치며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 최희용은 요즘 현역에서 은퇴하여 노후를 즐기는 중이다. 경제인협회 이사로써 지난 5월 제31대 첫 번째 정기이사회와 교육기금 마련 골프대회에 참여했고 경제인 소식도 놓치지 않는다. 경제인협회에 젊은 날의 애정이 깃들어있다.
▲네가지 모토
아내 이상옥은 91년 경제인협회부인회 초대회장이자 장학회장으로 활동하며 디자인 개발로 사업을 적극 내조해 왔다. 장남 기석은 뉴욕 테크니칼 칼리지 컴퓨터 전공 후 인터넷 비즈니스를, 차남 기훈은 포댐 로스쿨 출신 변호사이면서 엘보 방지를 위한 테니스라켓(XeneCore) 연구개발로 정부특허를 받았다. 손자 하나, 손녀 셋을 두었다.
50년이상을 의좋게 살아오는 노부부, 아내의 손을 꼬옥 잡고 집근처 식당으로, 공원 산책을 하는 모습이 보기좋다. 그가 평생 지켜온 ‘서두르지 말자, 신용을 지키자, 정직하자, 성실하자‘ 이 네 가지 모토만 따르면 누구든 어려운 이민생활에서 살아남아 아메리칸 드림을 이룰 것으로 보인다. <민병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