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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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는 이야기/ 희망을 나누는 행복한 메신저 한선애 소포집배원

2015-03-05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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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힘든 들지만‘희망 배달’자부심 크죠 ”

지도 보고도 헤매던 길치에서 이젠 어엿한 14년차 베테랑
전자상거래 주문상품 많아지면서 취급물량 늘어
하루 180~200개 처리...40파운드짜리 물건도 거뜬

일 년 사시사철 눈이오나 비가 오나 작은 우편트럭으로 맨하탄을 누비고 다니는 한인여성 집배원이 있다. 그가 나르는 소포에는 희망, 기쁨과 슬픔 등이 담겨 있다. 발바닥이 부르트도록 희로애락을 실어 나른 세월도 어느덧 14년. 칭찬과 감사를 보람으로 여기면 오늘도 땀흘려가며 열심히 일하고 있다. 그 주인공은 맨하탄 FDR 우체국 소속의 한선애(55) 소포 집배원이다.

■안정적인 삶 찾고자 우정공무원의 길로


한선애 집배원은 1995년 뉴욕에 왔다. 시아버지의 초청으로 남편 따라서. 두 아들도 함께 데려왔다. 가족이민을 온 것이다. 미국 도착이 낯설지는 않았다. 가족이민 전 아이들과 두 차례 미국여행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삶의 터전을 완전히 바꿔야 했다. 서울에 두고 온 부모와 형제 등 친정식구들이 눈에 밟혔다. 울고 또 울었다. 그렇게 1년 정도를 무기력하게 보냈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이 우울해질 것 같아 걱정이 앞섰다. 힘은 냈다. 용기를 내서 적극적일 삶을 살기로 다짐한다.

영어 못하는 이민 햇병아리.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아이들 학교에서 부모 위한 기초 영어 클래스로 달려갔다. 간단한 회화를 배웠다. 미국의 전통과 풍습까지 알게 됐다. 어디서도 얻을 수 없는 귀한 지식이었다. 그렇게 주부로서 아이들을 키웠다. 그리고 작은 아이가 중학교 때. 엄마가 집에 없어도 불안하지 않겠다고 여겨진 그 때 직업을 찾아 나섰다.

처음 직장은 롱아일랜드. 직업을 초기 이민여성들이 선호하는 네일이었다. 주인 언니를 잘 만나 약 2년 동안 기술도 배우고 돈도 벌고 좋은 사람도 사귈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시아버지와 작은 시누이가 우정공무원을 권유했다.

미국에 온 이민자들에게 가장 안정적이고 이상적인 직업이라고. 무엇보다 보험료가 너무 비싸 건강보험이 없었는데, 의료보험 혜택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미국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게 부담스럽고 걱정이 됐지만 안정적인 삶을 위해 우정공무원이 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2001년 5월 우정공무원 우편집배원 시험을 봤다. 그리고 그 해 11월3일 맨하탄으로 정식 발령을 받았다.

■가는 길로만 가라
그가 첫 수습지로 발령 받은 곳은 맨하탄 30가에 위치한 CPPF 우체국. 소포를 나르는 소포집배원(Parcel Post Carrier)으로 인터뷰를 했다. 소포를 나르는 2톤 트럭을 점검하고 주행, 파킹 등 운전시험도 봤다. 그렇게 그 곳에서 3개월의 수습을 하면서 일을 배웠다. 처음 일을 배울 때는 누구나 그렇듯 힘이 많이 들었다.

우체국에 출근하면 스트릿과 애비뉴 순으로 소포를 분류했다. 그리고 그 순서로 소형트럭을 몰고 소포배달에 나선다. 하지만 길을 가다보면 분류할 때 보였던 주소가 옆에 있을 때도 있다. 그러면 트럭을 멈추고 소포를 찾는다. 그러다보면 순서대로 분류한 소포가 섞인다. 조금 빨리 일을 하려다 오히려 엉망진창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수습한테는 꼭 ‘가는 길로만 가라’고 조언한다.

어디 그 뿐이냐. 햇병아리 시절에는 유니폼을 입고 음심 체인점에 들어가기가 망설여진다. 소포를 가져다주는 동네사람도 아는 이가 없다. 그러다보니 물도 안 마시고 점심도 굶는다. 배달 중 화장실에 가게 될까 걱정 때문이다. 수습시절에는 모르는 길을 물어 알아도 찾아가기가 왜 그리 힘든지, 늘 길치다. 조그만 지도를 보고 간신히 찾아가지만 언제나 숨바꼭질의 술래가 된 기분이다. 그런 시행착오의 과정을 겪으면서 길도 배우고 사람도 사귀고 이제는 어엿한 14년차 베테랑이 된 것이다.


■사고위험을 딛고
3개월의 수습을 무사히 넘긴 그는 맨하탄 36가 머레이힐 우체국으로 옮겨가 준 직원으로 3년 동안 더 일한 후 정규직원이 됐다. 수습시절을 보낸 CPPF 우체국에서 6년 정도 일을 하고 현재 일하고 있는 FDR 우체국으로 온지도 4년 정도가 지났다. 세월은 14년이 흘렀지만 유니폼과 2톤 차량을 그 모양 그대로다. 변화라면 수습에서 베테랑으로 변한 것. 또 예전에 비해 일이 더 많아져 거의 매일 오버타임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는 정규 직원이 되면서 4주의 유급휴가, 13일의 병가까지 받으며 일을 할 수 있어 다행이란다. 건강보험에 퇴직연금도 상당히 좋은 편이다. 거기에 나이와 은퇴 제한도 없다. 몸이 허락하면 언제라도 계속할 수 있다. 또한 하루 일과를 스스로 정해서 자율적으로 근무할 수 있으니 슈퍼바이저 눈치를 볼 일도 없다. 더불어 야간근무가 아닌 낮 근무만 한다. 그렇다고 다 좋은 것만은 아니다.

매일 우편트럭을 몰고 다니다 보니 늘 사고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그동안 작은 접촉 사고도 몇 번 있었다. 물론, 크게 다친 적은 없다. 사고의 경중에 따라 면허가 정지되면 일을 못할 수도 있는데 다행이 그런 적도 없었다. 소포를 나르는 육체를 사용하는 단순작업을 하다 보니 직업병이 있다.

소포를 배달하다 보면 무릎, 팔목, 허리, 어깨, 온몸 구석구석이 아프다. 특히 많이 걷다보니 무릎을 수술하는 직원들도 꽤 있다. 그래도 그는 미국에서 학교교육도 받지 않았고, 특별한 기술이나 완벽한 영어권도 아닌데 육신은 힘들어도 안정적인 직장에서 일을 하고 있으니 고마운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낸다고.

■칭찬과 감사에 보람을
그가 8시간의 근무시간에 처리해야 하는 소포는 대개 100-120개 정도다. 3파운드의 작은 소포도 있지만 40파운드 무거운 소포는 핸드트럭을 사용해 날라야 할 때도 있다. 예전 소포는 주로 개인선물 등 가치 있는 것들이었다. 요일로는 목, 금요일이 제일 많았다. 그러나 2-3년 전부터는 전자상거래 상품들이 늘어났다.

병물, 개밥, 세제, 테이퍼 타올 등 일상생활용품을 다 취급하다 보니 물량이 엄청 늘었다. 그가 매일 2시간 정도 오버타임을 할 정도다. 예전에는 기온이 나쁘거나 직원들이 휴가를 많이 갔을 때만 오버타임을 하곤 했다. 그러나 지금은 매일매일 180-200개 정도의 소포를 처리해야 하기 때문에 오버타임을 해야 한다.

참으로 중노동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벨을 눌렀을 때 개가 먼저 나온 적은 있어도 물린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래서 우체국에서 지급한 페퍼스프레이를 매일 갖고 다니지만 아직 써 본 적은 없다.

그는 매일 출근 전에 날씨를 확인하는 습관이 생겼다. 겨울에는 온도까지 꼭 확인한다. 새내기 시절에 궂은 날씨가 되면 진짜 일을 하기 싫을 정도로 힘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눈, 비가 오거나 폭풍이 몰려와다 그동안 쌓은 경험을 토대로 하루 일과가 힘든지도 모른 채 아무 걱정 없이 일을 한다.

소포를 배달할 때 꼭 지키는 것도 있다. 영세아파트에 갈 때는 꼭 집 앞이 아닌 문 앞에까지 소포를 배달한다. 주인이 없을 때는 우체국에 와서 찾아가라는 노티스만 남고 놓고 오지 않는다. 어떡하든 시간을 내서 한, 두 번 더 집에 들러본다. 왜냐하면, 그런 아파트에는 노인, 환자, 장애인 등 소포를 운반하는데 불편한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들이 고맙다고 감사를 표할 때면 자신의 직업에 대한 보람을 느낀다.

맨하탄에서 장사하는 한인들이 우편 트럭에서 나와 유니폼을 입고 소포를 배달하는 모습을 보면서 “참, 멋있습니다. 한국 여성이 이런 일을 하는 게 같은 한인으로서 자랑스럽습니다”라고 말할 때는 직업에 대한 자부심마저 든다고.

■자랑스러운 나
언젠가 뉴욕을 방문한 친정어머니가 “네가 소포 집배원을 할 줄 정말 몰랐다. 네가 이런 일을 한다는 게 너무 대견스럽다”고 했을 때 눈물이 글썽했다는 그는 ‘우체국 생활을 하면서 나 스스로도 게을렀는데 부지런해 졌다“는 새로운 삶에 만족과 감사를 하며 산다고 말한다.

불교가 모태 신앙인 그는 아무리 욕심을 부려봐야 소용없다며 행복이란 “현재의 만족”이라고 한다. 인생은 내 인생뿐 아니라 부모, 남편, 자녀들의 인생까지도 다 내 인생 속에 있는 것이라는 그는 “결혼은 참고 사는 거다. 살다보면 좋은 날이 오더라”라며 결혼해 살다보면 힘들 날도 있지만 현재는 만족하며 살고 있다고 강조한다.

인터뷰를 끝내며 소포집배원이란 어떤 의미라는 질문에 바로 “자랑스러운 나”라고 답변하는 그는 참으로 자신의 직업에 만족하며 살고 있다는 느낌이었다.<연창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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