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 우리 엄마가 치매 초기잖아요? 옆에 사는 아들 며느리를 걸핏하면 의심하세요. 말짱 하실 때는 ‘내가 이러면 안 되는데…’ 하다가도 어쩔 수 없으신가 봐요.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헷갈리죠.” 경이가 세초에 전화했다.
“아버진 극진한 애처가셨지요.”
경이 아버님은 대한민국서 둘째라면 섭섭할 애처가셨나 보다. 특히 그 세대라면 어험 하며 가부장 냄새 풍풍 풍겨야 한다고 믿는 세대였을 텐데도 말이다. 해외 출장 갔다 오시면 자식들은 제쳐놓고 어떻게든 아내가 좋아할 선물은 꼭 구해 오시곤 했단다. 경이는 그걸 ‘아내 위한 밀수품’이라 부른다.
“한번은 아버지가 스위스 출장서 오실 때 뺑 돌아가며 다이야가 박힌 시계를 갖다 어머니 드렸는데 어린 내 눈에도 고급 같았어요. 아버진 그 시계를 양주병 밑 움푹 들어간 곳에 테이프로 붙여 숨겨 오셨대요. 그야말로 밀수하신 거죠. 얼마 전 어머니가 그 시계를 잊어버리곤 며느리가 훔친 거라고 전화로 넋두리하셨어요.” 경이는 엄마가 어디다 잘 감춰 두고 또 그러신다 싶었다고 했다. 종종 그러시니까.
“엄마가 새해 첫날 전화해서 덜컥 했어요. 또 무슨 일 생겼나 싶어서요. 그런데 어머니 말소리가 아주 밝은 거예요. ‘경아, 네 친구 영이가 집에만 있지 말고 교회라도 가 보라 하길래 이 나이에 새삼스레 교회는 무슨 교회하고 있었는데 지난주엔 큰 맘 먹고 교회 갔더랬다. 글쎄 거기 목사님이 내가 아파트 단지에 꽃 심는 걸 보고 늘 고맙다고 하시면서 언젠간 비료 한 봉지까지 주신 바로 그 아저씨더라. 신통하지? 그뿐 아니다. 교회 갔다 와서 한결 마음도 가벼워졌으니 이참에 집안 정리라도 하자 싶어 경대 서랍장 정리를 시작했잖겠니? 근데 서랍장 구석에 허름한 필통이 있는 거야. 열어 보니까 아버지가 사다 주신 시계하고 다이야 반지가 거기서 나오더라. 결혼할 때 못 해줘서 미안하다며 너 중학생 때 해 준 반지 알지? 내가 거기에 잘 숨겨 두고는 까맣게 잊어버렸더란 말야. 어제는 송구영신 예배 가서 며느리를 도둑으로 몰았던 것을 잘못했다고 회개하고 거기서 새해를 맞았다. 집에 와서 잠이 안 오길래 그동안 미루었던 옷장 정리를 시작했지. 혹 아냐? 내가 또 무엇을 숨겨놓고 잊어버렸을지? 그런데 철 지난 옷들 밑에서 하얀 봉투가 나온 거야. 이게 뭔가 하고 열어 보니까 내 이름으로 된 외환은행 통장하고 백만 원짜리 수표가 여러 장 들었지 뭐냐? 내가 이렇게 정신없다.’ 하며 돈 찾은 것을 끔찍이 좋아하셨어요. 외환은행은 아버지가 거래하시던 은행이죠. 아버지가 어머니 위해 다달이 적금하고 계신 걸 저는 알고 있었어요.” 경이는 한동안 말을 끊었다.
“엄마, 그 수표 발행일이 언제예요? 하고 제가 물었어요.”
“어디 보자. 2006년이구나.” 어머니의 대답.
“통장은요?”
“그것도 2006이다. 까딱하면 돈도 통장도 다 날릴 뻔 했구나, 하면서요. 2006년이면 아버지 돌아가시기 전이지요. 어머니가 쓰기 좋게 미리 준비해 주고 가신 거예요.” 경이의 침묵이 수화기 끝에 납덩이처럼 묵직하게 한참을 매달려 있었다.
“그런데 엄마는 신나는 목소리로 계속하는 거 있죠? 경아, 내가 교회 가길 잘했지? 가서 둘째 의심한 것 잘못했다 하길 잘했지? 아니었으면 이걸 어찌 찾았겠냐? 하고요. 혹 또 무엇이 나올지 모르니까 오늘부터는 집안 정리 열심히 하련다, 하세요.”
남편이 아내 위해 남긴 보물, 밀수품 찾으러 나설 요량인가 보다.
“엄마의 밝은 목소리가 기쁘기도 하면서, 열 살짜리 어린애처럼 철없어진 엄마가 한없이 슬프기도 하네요.” 경이의 길고 긴 숨소리. “그런데 선배, 또 한편으로는 그토록 남 달리 남편의 사랑 받고 살았던 어머니가 같은 여자로 부러운 것 이해되세요? 나도 그런 남편의 사랑 받아 봤으면 … 싶어서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