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어느 가을 하루

2013-10-11 (금)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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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광순 / 워싱턴 두란노문학회

시시각각 형형색색 변하는 아름다운 계절이다. 가을의 정취를 만끽하고 싶어 상록회 회원들과 웨스트 버지니아에 있는 사과밭에 갔다. 시선 닿는 곳 어디라도 풍요로운 계절인 만큼 사과밭에도 이미 가을은 찾아와 있었다. 가을 햇살이 어찌나 좋은지 파란 하늘을 이고 잘 익은 사과 열매들이 나무에 주렁주렁 달려있다. 봄과 여름부터 하늘과 구름, 해와 달, 그리고 비바람을 친구삼아 놀면서 이렇게 자랐으니 이제 가을빛에 실컷 더 놀고 나면 제각기 임자를 만나 우리 인간들의 혀를 즐겁게 해 주리라. 달달하고 상큼한 사과 향기가 어느덧 은은하게 코끝을 자극한다. 껍질째 한입 베어 먹는 순간 과즙이 풍부해 물기 많고 부드러운 속살이 입 안 가득 고인다. 사과 밭이야 말로 계절의 정취에 한껏 빠져들기 더없이 좋은 곳이 아닐 런지.

갑자기 어렸을 적 먹었던 홍옥이 생각난다. 어릴때 가장 흔하게 먹던 것은 국광이나 홍옥이었다. 나는 특히 홍옥을 좋아했다. 달고 시고 그 맛의 오묘한 강렬함은 생각만 해도 입에 침이 돌게 만든다. 새콤달콤한 맛이 밸런스를 이루고 향기가 깊으며 사각사각 씹히는 질감이 좋았었다. 나는 그냥 달기만한 과일을 싫어하는 편이다. 이 미국에서야 이것저것 접을 붙여 이름도 희한하게 지어 놓으니 알 수 없고 마켓에서 파는 후지사과는 달콤하기만 하고 새콤한 맛이 처지고 서걱거리거나 왠지 스폰지 같은 질감이 영 아니올시다다. 그 많던 홍옥은 다 어디갔을까? 언젠가 한국에 나갔을때 홍옥은 눈 씻고 찾아 볼래도 없었지만 비스끄리무리 한 게 있어 먹어보니 예전에 내가 먹던 그 맛이 아니었다. 그나저나 사과 따러간다고 신바람 나서 왔건만 우리 노인들에겐 이 마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따는 방법도 모르겠고 손에 닿지 않는 것들은 긴 작대기를 준다 해도 행여 떨어져서 상처가 생기면 일년내내 고생한 사과농장 주인에게 왠지 민폐가 될 것 같았다. 마음만 있었지 결국 우리는 사과밭 주인이 종류별로 수확해 컨테이너에 이미 수북하게 쌓아놓은 곳에서 골라잡는 것으로 만족 해야 했다. 플라스틱 봉다리 하나에 마음껏 담아 갈수 있다니 노친네들 욕심도 많지 서로 질세라 꽉꽉 미어지게 담느라 생고생을 했지만 오랜만에 맛보는 유쾌한 하루였다. 서산에 지는 해가 긴 그림자를 드리우면 하루일과를 마무리하듯 농부들도 올 한해의 결실을 맺는 가을 마무리 작업에 한창이다. 인생의 마무리도 함께 생각해 보는 햇살이 유난히 좋은 어느 가을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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