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채굴

2013-09-05 (목)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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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는 Toner’s Bog에서 잔디를
가장 많이 자르는 분이셨다.
한 번은 종이로 엉성하게 막은
우유병을 할아버지께 갖다드린 적이 있는데
한 번에 쭉 들이키신 후, 바로 엎드려
잔디에 삽 자국 내고 깔끔하게 자르시고
어깨위에 쌓아 올리시며
아래로 더 아래로 좋은 잔디를 찾아
할아버지는 내려가셨다. 땅을 파는 일
차가운 감자곰팡이 냄새, 철썩 철썩 짓눌리는
젖은 이탄덩이, 살아있는 뿌리 사이
거칠게 잘려진 가장자리, 그것들이
내 머릿속을 깨운다.
하지만 나는 할아버지를 따라갈 만한
삽이 없다.
내 손가락 사이엔 단지 펜이
놓여있을 뿐.
난 이것으로 파내려 가리라.

세이머스 히니 (1939-2013)‘채굴’ 일부 <임혜신 역>

히니는 노벨상을 수상한 아일랜드 태생의 시인이다. 이탄 채굴을 하던 할아버지의 모습을 그린 이 시 속에는 흙과 함께 사셨던 할아버지에 대한 애정이 깃들어 있다. 동시에 문학의 길을 선택하는 시인 자신의 갈등과 굳은 의지가 엿보인다. 할아버지는 튼튼하고 큰 삽을 가지셨고 시인은 작은 한 자루의 펜을 가졌다. 삽이 할아버지의 천명이었다면 펜은 그의 천명이었으리라. 펜으로 세상을 한평생 채굴하던 시인, 그가 며칠 전 세상을 떠났다.

임혜신<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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