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오늘 하루 이 창 열지 않음닫기

교육칼럼/ 자폐아 양육기:유모차

2013-01-07 (월)
크게 작게
고등학생을 가르치다 보니 그들이 나누는 소소한 대화에 웃음을 짓곤 하는데 2012년도 끝자락에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의 자잘한 수다 주제는 지구 종말이었다. 학생들의 요점은 바로 이것이다. 마야문명달력에 의하면 2012년 12월21일이 이 세상의 마지막 날이기 때문에 그 다음 주가 방학인데도 학생들이 쉬지도 못하게 선생님이 손수 내주신 경제수업(현재 12학년 경제를 가르치고 있다) 리서치 프로젝트는 유감이지만 안해도 된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깐깐한 선생인 나는 지구가 멸망하면 다른 행성에서라도 프로젝트를 받으러 다니겠노라고 웃음을 섞으며 대답했는데 내 학생들에게는 유감이겠으나 2012년도는 유유히 흘러가 2013년도로 넘어와 있다. 내 학생들은 종말이 오지 않은 지난해를 원망하며 프로젝트를 해왔으며 나는 그들의 프로젝트를 채점하는 것을 교사로서 2013년의 첫 과제로 두고 있다. 직장에서 그렇게 첫 과제를 시작했다면 집에서는 엄마로서 올해 첫 과제는 그동안 에반이와 희노애락을 같이 했던 유모차와 드디어 ‘굿바이’를 하는 것이었다.

여느 아이를 키우는 엄마와 같이 아장아장 아기의 모습이 여전한 아이와 유모차는 언제나 같은 그림 안에서 기억이 되곤 한다. 볼이 터져나갈 것만 같은 아기의 모습을 하고 유모차에 앉아있던 에반이를 찍은 사진만 해도 상자 한 가득이다. 소아발달의에게 첫 자폐진단을 받을 때에도 무수히 치료실을 방문할 때에도 에반이는 그 유모차에 앉아 있었다.


하지만 여느 아이와는 달리 5세가 다 되어서도 길을 걸을 때 주변의 위험을 감지하지 못한 채 쏜살같이 내 손을 놓고 마구 차도로 달려 나가길 좋아하고 아무리 ‘멈춰라!’ ‘천천히 가라’ 말해도 에반이는 그 말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러기에 깜짝하는 사이 자기가 좋아하는 차가 쌩쌩 달리는 차도로 뛰어가려는 에반이를 붙잡으려고 손에 들던 장바구니를 땅에 내팽개치고 에반이 이름을 정신없이 부르며 쫒아가며 마음 졸이던 것도 수차례였다. 그러다보니 볼일은 봐야겠는데 매번 에반이 뒤를 쫒아 다닐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아이를 집에 혼자 두고 갈 수도 없으니 소위 유모차를 졸업해야할 나이에도 에반이는 유모차에 꽤 오래 앉아서 엄마와 참 많은 곳을 다니곤 했다.

에반이가 유모차를 졸업할 나이를 훌쩍 지났음에도 유모차를 애용(?)할 수밖에 없던 그 시기에 주변에서 던지는 지나가는 한마디 때문에 가슴이 아플 때가 많았다. 이렇게 큰 녀석이 유모차에 왜 앉아 있냐며 쳐다보고 지나치는 것도 신경이 쓰이는데 그렇게 큰 아이를 유모차에 앉혀 데리고 다니면 버릇이 나빠진다며 질책을 받은 적도 셀 수 없이 많다. 자폐를 모르는 그들에게 일일이 설명하기에는 엄마인 나는 너무 지쳤기에 대부분은 그냥 웃으며 지나쳤지만 유모차를 끌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눈에 눈물이 도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유모차에 앉은 에반이는 다리도 쑥 나와 있어 유모차 적령기가 지난 때임을 제일 잘 아는 것은 엄마인 나다. 그래서 몇 번이나 다시 유모차를 집에다 두고 같이 걸어가기를 시도했지만 매번 똑같이 가슴 철렁할 정도로 녀석의 뒤를 쫒아 다니거나 결국 허리가 빠듯할 정도로 녀석을 업고 집에 돌아와야만 했다. 유모차에 앉은 에반이를 보고 남들이 하는 질책 섞인 말쯤이야 하루 정도 지나면 더 이상 내 마음에 머물러 있지 않지만 ‘아차’ 하는 순간에 큰 위험이라도 당하면 어쩌나, 혼자서도 걸어 다녀야 더 많이 배우는 기점이 될 텐데 그 때가 과연 오기라도 할까 하는 걱정이 엄마인 나를 많이 괴롭혔다.

하지만 지난해 어느 무렵 길가에서 ‘에반아! 천천히 가!’ 하는 내 말에 마구 달려 나가던 녀석이 ‘기적처럼’ 딱 서서 내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의젓하게 서서 나를 뒤돌아보던 에반이의 모습을 또렷이 기억한다. 여전히 눈 맞춤이 힘들어 내 눈을 보지 않았지만 멀찌감치 앞에서 나를 기다리던 그 모습. 그 이후부터는 예전 같으면 마구 달려가던 자기 속도에 못 이겨 엄마가 뒤따라오는지도 관심이 없던 녀석이 달려 나가다가 엄마가 오는지 한번 슬쩍 뒤돌아보기도 하고, 엄마와 거리가 많이 떨어져 있으면 엄마가 오기를 기다릴 정도가 됐다. 절실하게 유모차를 안 가지고 다니기를 바라던 내가 알지도 못한 사이에 저절로 유모차는 집에 있는 날이 더 많아졌다.

자폐라는 장애는 그 발달의 정도와 속도가 장애인 개인에 따라 현저히 다르다. 때문에 자폐를 자폐 스펙트럼이라고도 한다. 따라서 에반이가 얼마나 자라는지를 관찰하는 것은 엄마의 큰 임무이다. 한 문장 정도로 말을 할 수 있는 에반이는 유모차에 섞인 자신의 복잡한 감정을 말로 풀어내지는 못하지만 이제 스스로가 유모차에 앉는 것이 어색하다고 느껴지는지 집에 있는 유모차를 보고도 가서 앉기보다는 이제 제법 밀어도 보기도 한다. 몸이 피곤하면 유모차에 가서 앉기부터 하던 녀석이 이제는 유모차에 가서 앉기보다는 엄마보고 안아달라고 하는 것이 신기하기까지 하다. 에반이는 나에게 이제 자신은 유모차가 필요 없는 의젓한 한 아이라고 표현하는 듯하다.

에반이의 장애가 개인마다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엄마지만 여전히 에반이의 고유한 발달정도를 그대로 인정해주지 않고 다른 아이와 마냥 비교하며 더디다고만 생각하고 조급해했던 것이 미안해진다. 에반이의 발달은 더딘 것이 아니며 자폐라는 테두리 안에서도 그 나름의 발달 궤도에 끊임없는 성장을 하고 있었던 에반이기에 앞으로는 에반이의 발달 정도를 한결 느긋하게 인정해주며 자랑스러워하는 엄마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새해를 맞아 그간 손때가 자잘하게 묻은 유모차를 차근차근 접어 밖에 내어놓으면서 올해를 시작한다. 에반이를 낳고부터는 내가 뭘 했는지도 까무룩한데 엄마로 어쩔 수 없는 건지 한 해 한해가 에반이의 이야기로는 또렷하게 기억된다. 몇 년이 지난 뒤 돌이켜보면 2012년도는 그간 아기로만 여겼던 에반이가 인격을 가진 아이로 훌쩍 커갔던 해로 기억이 될 듯하다. 이제 올 한 해는 내 눈높이에 에반이를 맞추는 엄마가 아닌 그의 발달에 내 눈을 맞춰 에반이를 좀 더 존중해주는 엄마로 한결 더 자랐으면 하는 소망이다.

변성희 교사(언어기술아카데미(ALT)교사/한국자폐인사랑협회 자문위원/ 한국자폐인사랑협회 자문위원)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