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이웃의 아픔 함께 해 큰 보람”

2012-11-07 (수)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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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게도 하나님은 남을 돌보는 일들을 저에게 계속 시키셨습니다. 어려움이 없었던 삶이 있겠습니까만 돌아보니 살아볼 만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워싱턴여선교회연합회 회장을 지내는 등 한인 교계 내에서 활발하게 여성 활동을 주도해온 김환희 씨가 훼어팩스카운티 경찰국을 물러나며 밝힌 소감이다. 그는 2000년부터 지난 달까지 경찰국 범죄 피해자 상담가로 일했다.
김 씨는 직업의 속성상 한인 커뮤니티의 안팎을 속속 들여다 볼 수 있었던 사람이다. 그를 통해 도움을 받은 범죄 피해자들 가운데 한인이 차지하는 비율은 10% 정도였지만 그늘진 부분이 혼재하는 한인사회의 실체를 파악하기에는 충분했다. 2000년 경찰국에 들어가 지난 달 물러나기까지 13년 동안 범죄 피해자들을 여러 케이스 가운데 한 사람이 아닌 강도 만난 이웃처럼 대하려고 노력했다.
“얼마 전 워싱턴 포스트 인터뷰와의 인터뷰에서도 말했지만 범죄 피해자들이 저를 만나 처음으로 인간다운 대접을 받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가장 기뻤어요. 포스트 기자도 놀라는 기색이더군요. 미국에 수 십 년을 살면서도 상상하기 어려운 범죄와 폭력의 피해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중에는 평생을 남편에게 얻어맞고 살았다는 여성도 있었다. 그것도 세계의 수도라는 워싱턴에. 그런 피해자들이 어떻게 자신의 권리를 찾을 수 있는지, 가해자가 어떻게 해야 정당한 벌을 받을 수 있는지 정보를 제공해 바른 결정을 하도록 돕는 일이 주 업무였다. 김 씨는 “피해자가 판사에게 쓰는 편지 한 장이 형량을 결정하는데 큰 영향을 준다”며 “극악한 범죄자에게 당한 사람이 있을 때는 반드시 편지를 쓰도록 권유했다”고 말했다. 그가 만났던 피해자 가운데는 아직도 연락하는 사람이 있다.
김 씨의 경찰국 근무 이전의 경력도 비슷한 면이 있다. 훼어팩스 카운티 공립학교 가족상담가로 일했고 이에 앞서 1985년부터 1992년까지는 한인복지센터(구 워싱턴봉사센터)의 버지니아 총무로 있었으니 문제를 당한 사람들에게 해답을 찾아준다는 점에서 크게 틀리지 않았다. 삶의 방향이 이웃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쪽으로 집중된 원인을 따지자면 조지워싱턴대에서 카운슬링을 전공한 탓이 크다고 볼 수 있다.
20대 중반의 젊은 나이 때는 민주화 운동에도 많이 참가했다. 당시는 김대중 전 대통령 등 민주 인사들이 탄압을 받던 시절이어서 문동환 목사 등이 주도하는 시위에도 열심히 참가했다. 문 목사는 감옥에 갇혀 있는 한국 민주 인사들의 석방을 위해 목요기도모임을 만들었고 김 씨는 10년간 회계를 맡았다. 김 씨는 “매달 모아진 헌금을 모두 양심수들을 위해 한국으로 보내졌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보내진 기금은 출옥한 장기수들을 돌보는 ‘사랑의집’ 건축에 쓰인 것으로 기억한다. 목요기도모임은 수도장로교회로 발전했다.
김 씨는 “앞으로 펼쳐질 인생을 보면서 초대교회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사도행전을 써나간다는 기대감이 있다”고 말했다. 날마다 말씀을 읽으며, 기도하며 받은 메시지 대로 ‘행동하는’ 신앙인이 되자는 결심을 하고 있다. 지금도 기도하기 위해 무릎을 꿇는 순간이 가장 행복하다.
“은퇴를 하고 나니 오히려 창공을 향해 더 큰 날개 짓으로 날 수 있을 것 같다”는 김 씨는 여선교회연합회 전국 조직을 다지는 일에 도움을 달라는 요청을 벌써 받아 놓고 있어 또 바빠질 일상을 예상하고 있다.
<이병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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