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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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칼럼/ 자폐아 양육기 (25)한 할아버지와의 만남

2012-10-29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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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성희 교사(언어기술아카데미(ALT) 교사)

에반이의 자폐에 대한 이야기를 쓰기 시작한 것은 내 개인적인 욕심에서였다. 신체적으로는 정상아와 다를 바 없이 건강한 에반이다. 때문에 “에반이를 보면 자폐가 있는지 모르겠어요”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하지만 정상아와 견주어볼 때 사회적, 지적 영역 등이 현저히 다르게 발달하는 자폐아이다.

그렇기 때문에 멀쩡하게만 보이는 에반이가 공공장소에서 엄마의 수 차례 저지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좋아하는 노래를 반복해서 부르고 앞좌석을 쿵쿵 발로 차게 되면 나 같은 엄마는 단번에 아이하나 단속 못하는 꼴찌 엄마로 전락되어 버린다. 신체 장애인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시각장애인에게 길을 비켜주는 따뜻함을 갖춘 일반인들이지만 에반이의 장애는 보이는 장애가 아니기에 그들에게는 에반이의 그러한 행동이 불편하고 이해가지 않을 뿐이다. 하지만 대중에 섞이는 법을 배울수록 이상행동을 줄일 수 있는 에반이기 때문에 엄마인 나는 다른 방법이 없다. 더 자주 버스를 타고 더 자주 에반이를 데리고 다니면서 어떻게 공공장소에서 행동해야하는지를 가르치고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도록 그 기회를 계속 주어야 하니 제법 일반인들의 소리 없는 찌푸린 눈살이 익숙해질 법도 한데 여전히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에반이의 자폐에 대해 알기를 바라고 그럼으로써 에반이를 조금 더 배려해준다면 내가 엄마로서 좀 더 편하게 살아가지 않겠는가하는 이기적인 바람이 있었고 그래서 에반이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나 살기 편하라고.
그랬기에 한동안 글을 쓰면서도 장애아를 키우는 엄마의 관점에서 더 많은 대중에게 에반이의 이야기를 나눠야겠다는 생각을 중점으로 두었지 내 글을 읽는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누구일지, 더 나아가서 내 글이 그 사람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를 심각하게 고려해본 적이 없다.

그런데 지난해 뵈었던 한 할아버지와 할머니로 인해 소소한 에반이의 이야기로만 여겼던 내 글을 큰 책임감을 실어 바라보게 된 계기를 갖게 됐다. 나는 매년 한인사회에서 자폐아를 둔 부모를 위한 세미나 및 컨설팅을 꾸준히 열어오고 있다. 작년 세미나에는 나이가 아주 지긋하신 할아버지나 할머니도 참석하셨다. 세미나에는 아이를 둔 젊은 학부모들이 대부분이라 맨 앞에서 열심히 초대강사의 말씀을 들으시는 그 분들께 내 눈길이 계속 갈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혹시 장소를 잘 못 알고 오신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세미나가 끝나고 한 할머니께서 내게 다가오셨다. 그 분은 지금 40대에 있는 자신의 자녀가 오랫동안 정신질환자로 간주돼 치료받고 있는데 내가 쓰는 칼럼으로 인해 에반이의 행동이 자신의 자녀가 어렸을 때 보이던 행동과 너무나 유사하다는 것을 알게 됐고 뒤늦게야 자신의 자녀가 정신질환자가 아닌 발달장애인이 아닌가 생각하게 됐다는 것이다. 이후 또 다른 할아버지께서도 내게 다가오셨다. 자녀 얘기를 들려준 할머니와는 달리 이 할아버지는 자신의 자녀 얘기는 하지 않았지만 참으로 진심을 실어 자폐아에 대한 칼럼을 써서 감사하고 나의 칼럼을 꾸준히 읽고 계신다는 말씀이었다. 에반이와 아웅다웅 하는 이야기를 계속 읽겠노라고 하신 그 분의 조용한 목소리가 아직도 내 귀에는 선명하다.

내가 오히려 많은 경험을 배워야할 연장자들께 그런 말씀을 듣고 난 뒤 그날 집에 와서 내 글을 다시 읽으면서 내 글에 대한 무거운 책임을 느꼈다. 나의 글은 더 이상 에반이의 장애를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서 나 하나 좀 편해보자고 쓰는 글이 되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반이를 재우고 밤에 도둑글을 쓸 때면 매번 나에게 고맙다던 그 할아버지의 눈빛을 기억한다. 몇 마디 되지 않은 짧은 대화였지만 나의 희로애락을 공감한다는 그 눈빛에 어쩌면 그 분 또한 자폐아 자녀를 둔 아버님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지금과는 시대가 달라 예전에는 더욱더 자폐아를 키우는 것이 힘들었을 터인데 나의 작은 글이 그 분에게 지나온 세월을 조용히 돌이켜보게 하는 시간을 마련해준다면 어찌 내가 내 글에 책임을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 할아버님, 오늘도 이 글을 읽으신다면 매번 글을 쓸 때마다 그 때의 만남을 항상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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