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희망의 행진

2010-11-20 (토)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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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자주 가는 한 병원에서는 아기가 태어나면 브람스의 자장가가 흘러나온다. 감미로운 자장가의 멜로디가 울려 퍼지면 피곤이 사라지고 마음은 포근해진다. 새록새록 잠든 새 생명의 놀라운 신비와 희망을 생각하며 잠시 상념에 잠긴다.

브람스의 자장가를 들으면서 새 생명을 출산한 지 얼마 안 된 젊은 여성이 급성 신부전증으로 입원하게 되었다. 환자의 신부전증 원인은 출산 후의 과도한 출혈이었다. 출혈이 되면 우리 몸에 혈액이 모자라면서 혈압이 떨어지고 모든 기관에 혈액순환이 부족하게 된다.

이런 위급상황일 때 우리 몸은 제한된 혈액을 산소 부족에 비교적 약한 기관으로 먼저 가게끔 조절을 한다. 뇌, 심장, 간과 같은 기관으로 가는 혈액은 유지시켜 주면서 콩팥이나 다리와 같은 근육으로 가는 피의 양은 줄인다. 그러다 보니 혈액공급이 부족한 콩팥은 쇼크 상태로 빠지게 되어 급성 신부전증이 생기게 된다.


더 약하면서 중요한 기관을 먼저 살리기 위해 콩팥과 근육은 어려운 시간을 참고 기다리는 것이다. 이 얼마나 조직적이면서도 상호 희생적인 우리 몸인가?

이 젊은 환자는 투석 치료와 수혈을 받으면서 혈압이 정상으로 되었고 죽음의 고비를 넘겼다. 쇼크 상태에 있던 기관들이 서서히 회복되었고 투석이 필요한 신부전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아기를 바라보는 산모의 얼굴에서 고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우리 몸속의 상호작용을 보면서 “몸을 살리고 인간 세상을 움직이는 힘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게 되었다.

삼각산 밑 세검정 초등학교에 다니던 때였다. 어려웠던 그 당시 산동네에는 불우한 학우들이 많았다. 우리 친구들은 불우학우를 돕기 위해 여름방학 동안 기금을 모으기로 했었다. 신문을 돌리는 친구도 생겨났고, 어른들의 구두를 닦거나 집안의 허드렛일을 돕고 받는 용돈으로 기금을 모으는 친구도 있었다.

나는 마땅히 할 일이 없어 아이스케키 파는 일을 시도해 보았다. 그러나 생각보다 잘 팔리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아이스케키는 녹아내리고, 너무 힘들고 더워서 자꾸 집어 먹다보니 기금을 모으는 일에 실패하였다.

그래서 낙담을 하고 있던 나에게 어머니께서 좋은 아이디어와 용기를 주셨다. 넓은 앞마당에 피어 있는 꽃들을 집 앞 길가에 가지고 나가 삼각산에 다녀오는 등산객들에게 파는 일이었다. 어머니와 나는 활짝 핀 예쁜 꽃들을 약간의 흙과 함께 조심스럽게 신문지에 쌌다.

보석을 흩뿌려놓은 것처럼 보인다는 홍색과 흰색의 채송화, 손톱에 물들일 때 사용하던 붉은색, 흰색, 분홍색의 봉숭아, 비녀가 변하여 꽃이 되었다는 연보라 빛의 옥잠화 등이었다. 꽃은 시내에서 삼각산을 오가던 등산객들에게 아주 인기가 좋았다. 5원, 10원 붙여 놓았던 가격표보다 더 많은 돈을 주고 가신 분들이 적지 않았다.

해가 서산에 뉘엿뉘엿 넘어갈 때 나와 어머님은 서로 바라보며 기쁨의 함박웃음꽃을 피웠다. 우리 친구들은 모은 기금을 가지고 불우했던 학우들과 같이 희망을 잃지 말자고 다짐을 했었다.

우리가 어릴 적, 큰 희생을 감당하며 어떤 상황에서도 꿈과 희망을 잃지 말라고 이야기 해주시던 어머님께서 얼마 전 중병으로 건강을 잃으셨다. 이제는 내가 도와드려야 할 차례다. 항암치료를 받으시며 힘들어하시는 어머니 옆에서 노래를 불러드리고 주사를 놓아드린다. 아내는 어머님께서 조금이라도 더 잡숫게 하려고 입맛 나는 음식을 준비하기 위해 애를 쓴다.


그리고 우리 가족은 매일 밤 거실에서 어머님과 ‘희망의 행진’을 한다. 기운이 없는 어머님은 휠체어를 붙잡고 걸으시고 나와 아버님은 그 뒤를 따르며 어머님이 좋아하시는 노래를 합창한다. 주로 행진곡과 같은 찬양이다. 어머님의 걸음이 비틀거릴 때마다 나의 목소리는 더욱 커진다. 그러면 비틀거리던 어머님의 걸음은 다시 똑바로 된다. 노래가 끝날 때까지 잘 하시면 나는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우리 어머님, 잘하셨네!”

우리를 위해 희생과 사랑을 아끼시지 않던 분들, 특히 부모님께 감사하고, 이제는 아내에게 진심으로 감사한다.


김홍식 / 내과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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