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살다보면 예기치 않는 고난(suffering)을 겪는다. 겪는 고난을 긍정적으로 처리하지 못하면 절망의 나락 가운데 빠져 허덕이게 되고 때로는 인생의 낙오자가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겪는 고난을 긍정적인 태도를 바라보고 수용하는 사람에겐 고난이 오히려 성장과 도약의 계기가 되고 창조성의 디딤돌이 된다. 말하자면 전화위복이 되는 것이다.
객관적으로 말하면 고난 그 자체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다. 고난, 그것은 언제나 중립의 자리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또 다른 기회인 것이다. 그러므로 겪는 고난에 대하여 어떤 태도로 반응하느냐,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고난이 그냥 고난으로 끝나지 않고 창조성과 깊은 관계를 맺게 될 때 이것을 “창조적 고난(creative suffering)”이라고 한다. 창조적 고난의 공식이 성립되려면 몇 가지 전제가 따른다.
첫째, 고난의 유익에 대한 긍정적 믿음을 가져야 한다. 둘째, 고난에 대한 강한 인내의 정신이 요구 된다. 셋째, 고난을 뛰어 넘을 수 있는 강렬한 꿈과 비전을 품고 있어야 한다. 이 세 가지 태도를 가지고 고난과 맞부딪칠 때 누구나 고난의 마이너스를 축복의 플러스로 바꿀 수 있고, "창조적 고난"을 경험하는 비범한 인물이 된다. 대표적인 사람이 아브라함 링컨이다. 링컨은 태어나서부터 청년기에 이르는 동안 내내 고난과 시련의 연속 속에서 살았다. 더욱이 그의 아버지 토마스는 술 주정뱅이였고 자식의 장래에 대하여 아무런 생각이 없는 단순한 농부에 불과했다. 그래서 링컨은 초등학교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링컨은 어린 나이에 어머니와 누이를 잃는 아픔을 겪었다. 고난에서 헤어나 보려는 요량으로 타향으로 나가 친구와 동업하다가 친구의 배반으로 빚을 졌고, 그 빚을 갚으려고 17년 동안 매우 어렵게 살았다. 더욱이 청년 때에는 가장 사랑했던 약혼자를 잃는 상처를 입었다. 공직에 관심이 있어 출마하였으나 17번이나 고배를 마시는 실패를 겪었다. 그의 인생은 문자 그대로 고난의 화신이었다. 그러나 링컨은 자신의 인생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모든 고난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신앙의 힘으로 이겨내었다. 그리고 마침내 미국의 제 17대 대통령으로 당선 되었고, 미국을 분열 가운데서 건져내고 노예해방을 선포하고 남북전쟁의 아픔을 치유하는 위대한 리더가 되었다. 링컨은 고난이 있었으므로 성장하고 성숙했다.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조개 속으로 들어 온 모래의 아픔을 긍정적으로 수용하므로 진주가 태어나듯이, 링컨은 그에게 다가온 고난과 시련을 잘 다루었기 때문에 미국의 위대한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구약 성경을 보면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란 광야 가데스에서 가나안을 정탐하고 돌아 온 직후에 갑자기 두려워 떨며 그 자리에 주저앉는 이상한 사건이 있었다(민수기 13-14장). 왜 그처럼 용맹스럽던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만 제외하고 모두 패배자가 되었는가. 그 이유는 단 한 가지다. 승리가 두려워서다. 그들이 그 자리에 머물러 있으면 편안하고 안전하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하늘에서 메추라기와 만나가 내린다. 반석에서 생수가 솟아 나온다. 그러나 가나안 안에 들어가면 고난을 피할 수 없다. 당연히 생명을 거는 전쟁을 해야 한다. 그래서 그들 중 다수는 더 이상의 모험을 거부하고 그 자리에 편하게 살다가 죽는 “no-risk"의 삶을 택했던 것이다.
누가 리더인가. “창조적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다. 성경에 나오는 요셉, 모세, 다윗, 바울 같은 위대한 인물을 보라. 그들에겐 다 고난이 있었다. 만약 그들에게 꿈만 있고 그 꿈을 연단하고 강화 시키는 고난과 시련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이 이름만 리더이지 진심으로 백성들의 아픔을 공감하고 치유하고 일으켜 세우는 참 리더는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윌리엄 펜은 늘 말했다. “No Cross, No Crown".
김창만 목사 <온누리순복음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