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오늘 하루 이 창 열지 않음닫기

신비한 푸르름 띤 빙하 ‘서프라이즈!’

2010-11-05 (금)
크게 작게

▶ <6> 세워드 하이웨이

임지나 <수필가> - 알래스카를 가다

오늘은 그토록 기다리던 빙하(glacier)를 보는 날이다. 남편과 영자씨가 아침 일찍 차를 렌트해 왔다. 우리가 달리고 있는 ‘세워드 하이웨이’(Seward Highway)는 미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23개의 시닉 드라이브(scenic drive) 중의 하나다. 앵커리지에서부터 세워드까지 127마일, 푸른 초원이 비단처럼 깔렸는가 하면 폭포가 쏟아지는 산, 하늘거리는 숲 사이로 청록색의 호수가 그림처럼 펼쳐지는 드라이브 길이다.

구불구불한 세워드 하이웨이 양쪽으로 펼쳐지는 풍경은 그야말로 비경이다. 이 세상의 그 어떤 부대낌도 여기서는 시원하게 바람에 날려버릴 수 있다.

오른 쪽은 ‘턴 어게인 암’(Turn Again Arm) 베이(bay)다. 턴 어게인 암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썰물과 밀물이 교차하는 곳이다. 때로 밀물 때와 썰물 때의 물 높낮이 차이가 38 피트나 되기도 한단다.



수천만 년의 역사를 담고 있는 서프라이즈 빙하의 웅장한 모습. 바위를 깎으며 바다에 이른 빙하가 무너져 내리는 것은 장관이다.


특히 ‘보아 타이드’(Bore Tide) 때는 3~5피트 정도의 높은 물결이 벽을 세우며 밀려오기도 한다. 지금은 썰물 때인지 매끈한 넓은 뻘이 배를 훤히 드러내 놓은 채 하늘을 쳐다보고 있다. 약간 붉은 색이 도는 개펄이 백사장처럼 뻗어 나가나 수영을 할 수 있는 곳은 아니다. 물 색깔도 황토 빛이다. 철썩거리는 파도에 씻겨간 툰드라 흙이 밀려와 쌓이고, 다시 씻겨간다. 바다 가운데 다소곳이 떠 있는 외딴섬의 산봉우리를 이름 모를 새들이 동그랗게 원을 그리며 날아간다.

비는 점점 굵어진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퍼붓는 비속에 자욱한 안개가 짙게 내려앉아 구름 속을 달리는 기분이다. 길옆에 휘늘어진 나무들이 허리를 휘청대며 쏟아지는 폭우에 흥건한 샤워를 한다. 왼쪽으로 철로길이 나란히 따라오다가 제 갈 길로 빠지고 산 위에서 눈 녹은 폭포가 다이빙하듯 하얀 거품을 퉁기며 떨어진다. 유리창에도 자욱이 서리가 끼고 나는 페이퍼타월로 그것을 지우기에 바쁘다.

수정 같은 빗물방울이 또르르 차창을 구른다. 내 가슴에도 말간 물방울이 쉴 새 없이 흘러내린다. 오래전 젊은 시절, 비에 젖으며 인생을 심각하게 고민한 적이 있었다.

그래도 그 때는 내게 많은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지친 심신을 안고 마지막 스퍼트를 다해 결승점으로 향하는 중이다. 초행길에 운전을 하는 영자씨나 가이드를 하는 나도 무척 긴장을 했다. 크루즈가 11시에 출발한다니 10시까지는 여행사에 도착해야 하기 때문이다.

배가 뜨는 ‘위티어’(Whittier)시는 터널을 통해서만 갈 수 있는 곳이다. 이 터널은 오전 9시30분에 문을 연다.

우리가 터널 앞에 도착한 시간은 9시10분이었다. 통행료는 차 한 대당 12달러다. 우리 뒤로 많은 차들이 줄줄이 따라붙는다. 이 터널은 기차와 자동차가 함께 쓰는 길이가 2.5마일이나 되는 미국에서는 가장 긴 터널이다. 그리고 혹한과 시속 150마일로 부는 강풍에도 끄떡없고 또 눈사태(avalanches)에도 안전하게 기차와 자동차를 컴퓨터로 교통정리하는 최초의 터널이다.

그 터널을 빠져나오니 바로 위티어시다. 하나님이 수도꼭지 잠그는 것을 잠깐 잊으셨을까. 비는 장대처럼 폭우가 되었다. 요즘처럼 둘러싼 산 속에 괴기스러울 만큼 조용한 ‘프린스 윌리엄 사운드’(Prince william Sound)는 비속에 흠뻑 젖어 졸고 있는 듯하다. 주위의 가슴이 저리도록 촉촉한 푸름이 만지면 손끝에 묻어날 것 같다.


위티어시는 미국에서 유일하게 통금이 있는 곳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터널을 통하거나 배를 타고 들어올 수밖에 없다. 아침 9시30분에 터널이 열리고 오후 6시에 그것이 닫힌다. 이곳에 사는 200여 주민들은 본의 아니게 다음날 통행이 재게될 때까지 외부와는 완전히 단절된다. 주민들은 14층짜리 빌딩, 한 지붕 밑에서 갇힌 셈이다.

위티어는 1942년 세계 제2차 대전 때 미국이 군수품을 운반하기 위해 설치한 비밀기지였다. 전쟁이 끝나고 1960년에 기지를 폐쇄할 때 그 지역 주민 50명이 25만달러의 융자를 얻어 14층짜리 빌딩을 매입했다. 그러므로 오너십은 코압(coop)이다. 지금도 그 때 그대로 한 지붕 밑에 도서관, 병원, 마켓, 볼링장, 수영장 식당 당구장 등 시민들에 필요한 잡다한 시설이 들어 있다. 위티어시는 싱글 패밀리 홈이 한 채도 없다.

그토록 억세게 퍼붓는 비속에도 크루즈는 순조롭게 제 시간에 시동을 걸었다. 센트럴 알래스카에서 가장 아름답기로 유명한 프린스 윌리엄 사운드는 알래스 만의 3,000마일 해안이 추가치(Chugach) 산에 둘러싸여 동서와 북으로 뻗쳐 있는 천혜의 요새다.

통틀어 1만명도 안 되는 인구가 여기저기 흩어져 오직 배로만 왕래할 수 있다. 이곳은 1,500만년 전에 빙하가 시작된 곳으로 추측한다. 그 높이가 4,000~6,000피트라고 하니 웬만한 남가주의 산 높이다. 물은 에메랄드보다 더 파랗고 짙어 가슴속까지 시리게 한다. 주위는 시간이 멈춰버린 듯 조용하고 적막하다. 비바람이 불어치지 않는다면 여기가 지구의 끝은 아닐까 느껴질 정도다.

이곳은 알래스카에서 유일하게 흑곰이 나타나는 곳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흑곰은 결국 우리 눈에 띄지 않았다.

프린스 윌리엄 안에는 다섯 개의 큰 빙하가 있다. 그들은 모두 하나 같이 동부의 명문 대학 하버드, 예일, 베사와 같은 이름들을 갖고 있다.

1989년 석유회사 엑손이 발데즈 지역 700마일에 기름을 유출시켜 그중 200마일이 치명적인 손상을 입었다. 그 때 5만마리의 시 버드(sea bird), 시 오터스(sea otters), 그리고 26종류의 새들이 죽었다고 한다. 프린스 윌리엄 사운드 근처의 76만에이커를 오염시켜 그것을 청소하는데 900만달러가 들었다.

재판에서 엑손은 50억달러의 벌금형을 받았지만, 아직까지 한 푼도 안낸 상태라고 한다. 미국도 돈이 많으면 법도 피해갈 수 있는 모양이다. 현재까지 완전히 복구된 것은 발드 이글(Bald Eagle)과 리버 오터(River Otter)뿐이라고 하니 인간의 나은 삶을 위해서 발굴한 자원이 우리 인간과 자연을 얼마나 무참히 파괴할 수 있는 지 몸서리 쳐지는 일이다. 더 나은 삶을 위해 한 가지를 만들면 그것이 또 다른 것을 파괴한다. 또 그것을 막기 위해 다시 다른 것을 만들고 그리고 또 다른 것을 부수고 다시 만들고…

시 오터가 하늘을 보고 누워 수영하는 모습이 깨물어주고 싶도록 귀엽다.
내 앞에 앉은 한 무리의 여행객들은 아마 전문 사진사들인 듯싶다. 무섭게 퍼 붓는 비속에도 노상 들락거리며 사진들을 찍어댄다.

“당신 어디서 오셨어요? 전문 사진사예요?”

내 질문에 그녀는 뉴욕에 있는 신문사 사진기자라 했다. 어쩐지 사진 찍는 폼도 사진기도 모두 프로 같았다. 나도 내 디카를 솜씨 있게 눌러댔지만 내가 간절히 원했던 시 오터의 헤엄치는 모습은 끝내 건지지 못했다. 거리가 너무 멀어 렌즈에 담을 수가 없었다.

한참 들어가니 그물을 친 듯 수많은 말뚝 같은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 앞에 상선 같은 배도 한척 떠 있다. 선장이 거기가 연어 부화장이라고 했다. 여기서 연어를 부화시켜 바다로 내보낸다. 연어가 부화해서 다 자랄 때까지 상선들이 그 곳에서 연어 잡는 것을 금하고 있다. 선장이 왼쪽을 보라고 한다. 험프백 고래가 엄청난 몸을 솟구쳤다가 물속으로 잠수하는 모습이다. 와! 하고 달려나갔을 때는 이미 물속으로 사라진 후다.

언제 다시 솟아오를지 모를 고래를 오랫동안 비속에서 기다렸다. 옷이 다 젖는 것도 잊은 채 애타게 기다리던 고래가 물을 뿜고 솟구쳤지만 그 멋진 사진을 찍지는 못했다. 뉴욕에서 온 사진기자는 고래가 꼬리를 쳐들고 잠수하는 모습과 씨 라이언이 서로 얼굴을 비비대는 모습을 멋있게 찍었다.

바다 위에 얼음이 둥둥 떠내려 온다. 빙하가 가까워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휘몰아치는 비속에 뿌연 안개 속으로 푸른빛을 아릿하게 발산하며 드디어 우리의 상상을 불허하는 거대한 빙하가 요염한 모습을 드러낸다. 우리를 맞이하는 ‘서프라이즈 빙하’(Suprise Glacier)다.


위티어로 가는 길에 만난 대자연의 모습. 고봉들을 덮고 있는 눈들이 녹아 커다란 폭포를 이룬다.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