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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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일 속 매킨리 순백의 고고한 자태

2010-10-29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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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매킨리 산

임지나 <수필가>
알래스카를 가다

긴긴 추위 속 싹틔운 들꽃 짧은 여름 서러워
지천에 깔린 고사리 초원 춤추듯 하늘하늘


오후 2 시께 프린세스 호텔 관광버스를 타고 매킨리 산이 보이는 제2의 호텔로 이동을 했다. 버스가 달리기 시작한 지 15분쯤 됐을까, 길가에 차들이 쭉 멈춰 서 있고 사람들이 떼를 지어 웅성거린다.


운전사 말이 곰이나 순록사슴(caribou)이 나타났을 것이라고 한다. 아니나 다를까 다리 밑으로 흐르는 강가에 무스 두 마리가 한가롭게 거닐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거리가 멀어서 자세히 볼 수는 없어도 저리 다정하다면 암컷과 수컷일 것이라고 나름대로 생각을 했다. 저마다 그 것을 카메라에 담느라 정신이 없다. 나도 서둘러 한 장의 사진을 찍었다.

오후 다섯 시가 다 돼서 우리는 호텔에 도착했다. 이 두 개의 프린세스 호텔은 프린세스 크루즈를 운영하고 있는 P & O Cruise 소속의 호텔이다.

어젯밤 들뜬 기분에 과식을 했는지 하루 종일 나는 속이 좋지 않았다. 여기서 매킨리 산까지는 40마일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매킨리 산 정상 높이를 딴 식당 이름이 ‘20,32’이다. 매킨리 산은 북미대륙에서는 가장 높은 산이다. 알래스카 원주민들은 이 산을 ‘데날리’라 부른다. 매킨리란 미국의 제 25대 대통령 William McKinley 성을 따서 붙인 것이지만 그것은 정치적인 이유에서였다.


미국의 최고봉 매킨리의 장엄한 모습. 문명의 때가 묻지 않은 광대한 산림 뒤로 솟아 오른 모습이 신비롭게 느껴진다.


이 산에 영원히 그 이름을 남긴 매킨리 대통령은 1896년에 대통령에 당선돼 19세기와 20세기를 거쳐 대통령 (1897~1901)을 지낸 유일한 인물이다.

이 짧은기간에 매킨리 대통령은 비로소 미국을 세계적으로 강력한 나라로 군림하게 한다. 이 대통령은 머리 또한 매우 좋아서 16세에 펜실베니아에 있는 한 대학에 입학을 했지만, 건강문제로 그 대학을 마치지는 못했다.

매킨리 대통령이 재임하는 동안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이긴 미국은 필리핀, 푸에르토리코, 괌 등을 미국의 영향력 아래 다스리게 된다. 또 미국의 50번째 주인 하와이를 합병시킨 사람도 바로 매킨리 대통령이다. 미국과 스페인의 전쟁 때 쿠바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미국은 쿠바가 독립을 하도록 돕고 파나마 운하도 개설을 한다.

매킨리 대통령은 1900년의 재선에서 이겼지만 1901년 뉴욕 버펄로에서 연설 도중에 무정부주의자 리온 탈 고쉬란에게 암살당하는 비운을 맞게 된다. 이로써 그 분은 미국에서 암살당한 3번째 대통령이 된다.


어제까지 찌푸린 시어머니 같던 날씨가 오늘은 화사하게 웃는 며느리 같다. 어젯밤에 미리 예약했던 왜건 (historical wagon)을 타고 공원을 돌아보기로 했다.
맘 같아서는 헬리콥터를 타고 상공을 날아 매킨리 상봉에 내 발자국을 또렷이 새기고 싶었지만 나를 제외한 일행들이 원치 않아 마음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하늘은 더 없이 맑고 높아 가을을 연상케 한다.

알래스카는 이제 겨우 초여름인데 나는 벌써 삶이 저물어가는 가을을 향해 가고 있는가. 아니, 벌써 나는 그 문턱에 걸터앉아 있는 지도 모른다. 앞으로 차가운 겨울을 맞고 그 지독한 추위를 견디면 자연은 다시 돌아와 봄을 맞이하겠지만 내 삶은 다시 봄을 맞지는 않을 것이다.

이름 모를 야생화가 여기저기 피어 있다. 알래스카에 꽃들이 필까 무심히 생각했다. 그 길고 긴 시련을 견뎌내 꽃을 피울 수 있으리란 것을 상상이나 해 봤을까.

기차를 타고 오는 동안 무수히 지나치는 고사리 밭을 보며 그 위에 누워 보고 싶다는 생각을 몇 번이고 했다. 여기도 고사리는 지천으로 깔려 있다. 이미 때가 늦어 오동통한 고사리는 갔어도 넓은 초원을 뒤덮은 고사리 잎은 춤을 추는 여인처럼 하늘거린다. 사랑하는 사람의 가슴 속으로 숨어들고 싶어서일까.

부대낀 세월 따라 다 타 버린, 그래서 지금은 태울 것이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는 빈껍데기뿐인 내 가슴에 아직도 사랑의 희미한 불씨가 남아 있는 것일까.

한참 올라가던 마부가 뷰포인트에 마차를 세운다. 울창한 숲 사이로 내려다보이는 레나나 강이 수십 길 낭떠러지다. 자칫 발을 헛디디면 어찌 될지 보기만 해도 다리가 후들거린다.

멀리 매킨리 상봉이 하얀 만년설을 뒤집어쓰고 그 크고 육중한 몸체를 밀어올린다. 하얀 베일 속에 신비의 몸을 감추고 매혹적인 자태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그들의 혼을 빼앗았을까.

순백색의 그 거대한 몸체가 하늘을 찌를 듯 고고하게 솟아 있다. 하늘이 티 없이 맑은 날은 홀랑 벗은 나신을 부끄럼 없이 저리 뽐내는 모양이다.

마부가 우리를 캠프파이어가 타고 있는 원두막 앞으로 와 풀어 놓는다. 원두막 안의 장작들이 매운 연기를 뿜으며 아지랑이처럼 흩어진다. 손님들에게 머쉬멜로우를 낀 막대기를 하나씩 나눠준다. 동그랗게 둘러앉아 어린애들처럼 낄낄대며 머쉬멜로우를 구워 먹는 맛이 소풍을 나온 것 같다.

몇년 전 헌팅턴비치에서 캠프파이어를 한 적이 있었다. 별빛이 흐르는 밤, 불을 피우며 모래사장에 누워 내 젊은 날을 다시 찾아가 보기도 했다. 그 밤, 바다의 파도소리는 유난히 가슴을 아프게 때렸었다.

원두막 옆에는 레인디어 두 마리가 그들의 몸보다 더 큰 뿔을 흔들며 한가롭게 노닐고 있다. 가이드가 승객들에게 검불이 섞인 흙 덩이를 한 움큼씩 담은 바가지(Pan)를 하나씩 나눠준다. 금 채취를 할 것이라고 했다.

그의 지시대로 물이 담긴 통 옆에 서서 모두들 바가지를 열심히 흔들어댄다. 분명히 그 흙속에는 금이 들어 있으니 물에 씻겨나가지 않도록 할 것을 몇 번이가 주의를 받았다.

정말 그대로 조심스럽게 여러 번 걸러내니 흙이 다 걸러나가고 밑바닥에 금싸라기가 몇 개 남는다. 가이드가 그것들을 고이 포장해 손님들에게 쥐어주었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이 금을 간직하는 한 당신의 인생은 언제나 풍요로울 것이요” 내 인생의 풍요로움을 잃지 않기 위해 그 금싸라기를 고이 간직했다. 다음은 레인디어 키스 게임을 한다고 했다.

레인디어 키스가 무엇인지 몰라 머쓱하던 사람들이 삽시간에 몇 번씩 그 키스를 되풀이 한다. 비스킷을 입에 물고 레인디어 입 앞에 살짝 대면 사슴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비스킷을 채 먹는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시도한 것은 무스 키스다. 두 개의 커다란 무스 뿔을 목에 걸고, 두 손은 뿔을 잡고 입만 딱 맞춰 열정적으로 키스를 해야 한다. 두 뿔이 서로 부딪쳐 입술을 맞추기가 그리 쉽지 않다. 어떤 부부는 몇 번을 뒤풀이 한 끝에 겨우 키스를 성공시켰지만 나와 남편은 단번에 정열적인 키스를 올 인 시켰다.

우리가 앵커리지로 돌아온 건 저녁 7시 반쯤이다. 네 사람의 앵커리지 승객을 위해 프린세스 호텔에서 특별 운행을 했다. 내일 잡혀 있는 빙하 구경이 우리 여행의 클라이맥스가 될 것을 기대하며 나른한 꿈속으로 빠져들었다.


사금 채취를 체험하는 관광객들. 노다지의 꿈을 캐려는 사람들의 진지한 표정이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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