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여상주(女喪主)

2010-09-09 (목)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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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봉호 수필가, MD

나의 교단생활 40년 중에 고교 학과 담임을 맡았던 기간은 사분의 일 기간 밖에 안 되었다. 짧은 기간에 생긴, 지금도 생각나면 가슴 뭉클한 한 여학생의 이야기가 있었다.
90년대 봄날. 둘째 시간에 1학년 11반을 들어가 출석을 부르려다가 말고 늘 하던 습관처럼 학생들 좌석을 한눈으로 돌아보았다. 맨 앞자리 한 자리가 비어 있었다.
나는 선뜻 불길한 예감이 머리를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이 자리가 우미나 자리지? 아직 안 온 거야?” 학생들 여럿이 함께 대답을 한 말에 나는 내 귀를 의심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미나는 올해 입학을 하여 우리학교에 적응한지가 두 달이 채 안된 상태인데도 학교생활이 아주 바르고 열심이며 특히 학급에서나 학년 전체에서 무엇이던지 모범적인 그런 학생이었다. 내가 미나를 특별히 아끼는 이유도 언제든 바른 태도로 수업에 열중하는 학생이었기에 다른 학생들 보다 귀엽고 정이 더 많이 갔다. 아직 다른 학생의 이름은 다 못 외우는 상태지만 미나의 이름은 출석부에 붙은 사진을 보고 제일 먼저 외워 두었던 것이다.
정규 수업을 마치자마자 미나의 담임선생님에게 함께 문상(問喪)가기를 청하였더니 보충지도가 있어 그것을 끝나고 가려 한다기에 뒤에 수업이 없는 나는 미나 이웃에 사는 정혜와 함께 먼저 가기로 했다.
솔직히 말하면 미나 부모님과 나는 생면부지의 모르는 사이지만 아버지나 어머니를 보고 문상을 가는 것이 아니었다. 미나네 집을 향해 가는 동안 정혜에게 몇 가지 의문점을 질문하던 나는 그만 말문이 막혀 버려 더 이상의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미나 네는 딸만 둘인데요, 미나가 큰 딸이에요.” “미나가 아마 상주(喪主) 노릇을 해야 할걸요.” ‘아! 하나님, 그 어린 것이 상주 노릇을 하여야 하다니...’
나는 전기에 감전된 사람처럼 온 몸에 전율을 느껴왔고, 듣지 말아야 할 말을 들은 것처럼 벗어버리지 못하는 비통함을 가슴에 쓸어 담으며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상가 집 대문을 들어섰다.
일을 도와주고 있는 사람들의 표정이 모두 슬픔으로 굳어 있었다. 나는 그 이웃사람들의 인정어린 일처리에서도 평소 미나 부모님이 이웃에 대해 어떤 정성을 어떻게 기울여 왔는지 그 잔잔한 모습들이 머리에 떠올랐다. 잠시 머뭇거리던 나는 아는 이 하나 없는 그 사람들의 틈을 비집고 향내가 진동 하는 고인을 모신 방으로 들어갔다.
미나 형제가 베 상복을 입은 채로 나를 보자마자 놀라는듯하면서 또 다른 슬픔에 눌려서인지 고개를 숙이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 슬픔을 애써 감추려는 듯 어깨까지 들먹였다. 나는 고인에게 절을 하는 대신. 고인의 영정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자그맣게 소리를 내어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이 어린 것들이 어떻게 살아가라고 가장(家長)을 먼저 데려 가십니까. 가장이 없는 이 집안을 누가 이끌어 가야 합니까. 미나는 아직 어립니다. 하나님, 이 집안의 가장이 되시어서 남은 가족들을 눈동자같이 붙들어 주시옵소서. 샘솟는 용기와 굳은 인내를 주시고 유가족들의 건강도 지켜주시어서 험한 세상 살아가는 동안 아주 작은 풍파라도 견디어 낼 수 있도록 붙잡아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기도를 마치고 일어서서 미나 앞으로 다가가 미나의 손을 내 두 손으로 다잡아 꼭 쥐어 주었다. 억지로 참기라도 하듯 내 가슴 앞에서 미나 울음은 마침내 터지고 말았다. 나는 한참을 같은 자세로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나는 무슨 말로 이 아이를 위로하여야 할까? 마땅한 말이 천 길 낭떠러지를 오르내리며 떠오를 줄 몰랐다.
돌아오는 길의 저녁노을이 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지만, 눈물에 가린 내 눈은 그 아름다움을 충분히 느낄 수가 없었다. 참았던 입안의 침이 꿀꺽 소리를 내며 삼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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