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화전 간다

2010-07-27 (화) 12:00:00
크게 작게
좌석이 없는 좌석버스를 타고 간다
삼표연탄 이름만 남아있는 자리
백미러 같은 낮 달 떠있다
‘이번 정류장은 수색극장 앞입니다 다음 정류장은 구름다리입니다’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구름다리 건너
검문소 앞에서 검문 당하는 청춘(靑春)
이등병의 배지를 달고 있다
물빛처럼 푸른 군복
수색엔 온통 일렁이는 것들만 살고 있다
‘...... 다음 정류장은 항공대학교입니다’
빨간 애나멜 구두를 신고
파란 종이비행기를 날려 보내던
삼표연탄보다 활활 타오르던 시절 어디에도 없다

좌석이 없는 生을 타고 간다
꽃밭은 없고 이름만 남아있는
화전花田간다


안현미(1972 - )



사람만 죽어서 이름을 남기는 게 아닌가 보다. 지나간 시간도 이름을 남긴다. 화자는 좌석이 없는 좌석버스를 타고 가면서, 이름만 남아 있는 지난날들, 이름으로 추억되는 청춘을 만나게 된다. 수색극장, 구름다리, 검문소, 수색, 항공대학교, 삼표연탄, 구름다리, 꽃밭이 없는 화전花田... 모처럼 고국을 방문하게 되면 그리웠던 곳을 버스로 돌아보는 것도 좋겠다. 그러면 아직도 남아있는 옛 이름들이 빨간 구두를 신은 첫사랑을 보여줄 지도 모르겠다.


김동찬 <시인>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