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 각자 모두는 본인의 모습에 만족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글쎄,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일 인치만 얕았어도 역사는 바뀌었을 거라 하니 그 할머니는 자신에 모습에 대단한 긍지를 지닌 듯도 하지만 말이다.
간혹 가다 문 밑으로 신문이 넣어진다. 아마 내가 텔레비전도 없고 하니까 세상소식을 접할 매개체가 없는 듯해서 가여움이 여겨지신 탓이리라.
호주에 사는 어느 청년이야기가 내 관심을 끌었다.
‘오체불만족’이란 책으로 많은 장애인에게 용기와 힘을 북돋아 준 ‘오토’와 같이 두 팔과 두 다리가 없다. 너무 한가로운 중으로 지내는 나는, 그 어떤 생각을 하면 필히 답을 얻어내야 하는 것처럼 그 생각에 몰입한다.
이런 습관이 학창시절에 있었다면 나는, 장학금의 도움으로 부모님께 효도를 했을 것이다.
지금 나는 운명의 장난인지? 하나님의 계획 탓인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하여간 오체 중 하나인 다리가 시원치 않아서 휠체어를 타고 있다.
두 팔과 두 다리가 없다? 그런데 오토의 경우는 전동 휠체어를 타고서는 절대로 못 가는 곳을 제외한 그 어디라도 종횡무진 하며 다닌다. 또 호주의 그 청년도 골프 등등의 스포츠를 하면서 인생을 즐기고 있다.
나는 사고 당해서 생각은 정상적으로 한다고 느끼는데, 옳은지는 모르겠다.
하여간 머리를 다치고 무릎 뼈가 부서져서, 나의 오체도 정상은 아니다.
책이나 신문에 실린 두 사람은 뭐가 좋은지, 하여간 파안대소(破顔大笑)의 얼굴이다. 그 사진을 보면서, 내가 주절인 말은 이것이다. 참내! 웃음도 나오겄다.
그렇게 그 두 사람을 생각하며 대신 걱정을 하다가 ‘밀알’ 모임에 갔다.
오늘이 목요일이기 때문이다. 예배 후 열린문교회(에제르)에서 친교를 해 주셔서 음식을 먹는데, 간사하게도 내가 언제 우울하게 걱정을 했던가 싶게 방실방실. 성경에 써져 있다. “네가 근심하므로 한 자의 키를 크게 할 수 있냐”고.
사지육신이 옳게 있지 못해도, 장애를 지닌 사람 모두는 슬프게 지내지 않는다. ‘오체불만족’이란 타이틀과 함께 나온 두 주인공도 결코 슬퍼하지 않는다. 모두가 그들을 대하는 사람들의 선입견일 따름인 거다.
불편함 속에 있을 지라도, 부족한 육신으로 모든 것에 열심을 내며 지낸다.
이런 것을 깨달았기에, 나는 의기양양하게 무엇이든 도전해 보며 살아야겠다는 의지가 섰다. 행여 사고를 당해서 다리가 잘렸다 해도 내가 사람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하다못해 원숭이도 애완용으로 기르는 세상이다.
사람, 같은 성향을 지닌 사람의 육신 중 어느 것이 부족하거나 모양새가 다르다고 해서 그 사람을 색안경을 쓰고 본다면, 장애가 있는 사람은 살 의욕을 상실할 것이다.
나는 내 움막을 탈출해야만, 세상소식을 안다.
칠레에서 지진이 일어 또, 1000명가량이 죽었다고 한다. 성경 말씀대로 기근과 지진이 곳곳에서 발생되고 있다. 이런 때일수록 우리는 서로를 사랑으로 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체가 물론 지으심을 얻은 대로 지낼 수 있으면 무한 감사한 것이요. 혹여 그렇지 못한 상황이라도 감사하며 지내야 함이 옳다고 생각한다.
이렇듯 기특함을 지나다가도, 심술궂게 먹구름에 굵은 빗줄기를 뿌려내는 하늘로 변해짐은 어인 일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