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새끼 돼지의 배신

2010-05-25 (화)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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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 마을 새끼 돼지 학살 사건의 진상이 밝혀졌다. 어미 돼지가 이웃 살인 사건 전담반원들과 사건 현장을 정밀 조사한 결과 죽은 새끼 돼지의 몸에서 과거 옆집 늑대가 저지른 범행 현장에서 발견된 늑대의 치흔과 침 등 체액을 검출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늑대에게 이 사실을 통보하자 늑대는 펄쩍펄쩍 뛰며 이 모든 것이 날조라고 우기면서 또 한번만 이 사실을 입에 올릴 경우 전면전도 불사하겠다고 선언했다. 이 늑대는 과거 숱한 깡패 짓을 하고 다녔지만 한번도 자기 잘못을 시인한 적이 없는 동물이다.

범인은 밝혀졌지만 돼지의 고민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늑대가 또 담을 넘어오면 이제는 맞서 싸워야 하는데 배고프고 악만 남은 늑대와 싸워봤자 나올 것이라고는 내 몸의 상처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돼지를 괴롭히는 것은 늑대만이 아니다. 분명 자기 젖을 먹고 자랐음에도 이번 사건이 터지자 늑대 편을 드는 새끼 돼지들이 있는 것이다. 이들에 따르면 아기 돼지들이 죽은 것은 이들을 보호할 책임이 있는 어미 돼지가 쿨쿨 잠만 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잠자는 아기 돼지를 늑대가 문 사실에 대해서는 이상하게 얘기가 없다.

차기 돼지 집안 지도자를 자처하는 한 새끼 돼지는 조사 결과가 나오기 전에는 아기 돼지들이 늑대에 물려 죽었다는 주장은 소설과 억지라고 주장하다 더 이상 부인하기 힘든 증거가 나오자 “돼지를 무는 것은 늑대의 본성”이라며 “그것도 몰랐느냐”면서 오히려 어미 돼지를 타박했다. 이 새끼 돼지는 전에 늑대와 돼지는 모두 같은 동물이라며 살점을 다소 떼어주는 한이 있어도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고 우기던 짐승이다.

돼지의 살을 원하는 늑대의 심정은 이해가 가지만 같은 돼지이면서도 늑대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이런 새끼 돼지들을 어미 돼지는 좀처럼 이해할 수 없다. 이런 돼지의 탈을 쓴 늑대들은 무슨 연유인지 늑대 집으로는 죽어도 가려하지 않는다. 만약 늑대가 새끼 늑대들을 이끌고 전면 공격을 감행해왔을 때 돼지 탈 늑대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 지가 어미 돼지로서는 큰 걱정거리다. 돼지의 몸으로 늑대와 맞서 싸운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닌데 몇몇 새끼 돼지들마저 파토를 놓는다면 돼지 집안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과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한가지 다행스런 것은 이번 늑대의 횡포가 워낙 심했기 때문에 새끼 돼지 중 절대 다수가 늑대의 정체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됐다는 점이다. 늑대와 돼지는 한 몸이라는 늑돼일체 주장의 오류를 깨닫고 늑대는 돼지의 살을 원하는 육식동물이라는 점을 깨닫는 돼지가 늘기 시작한 것이다. 돼지 탈을 쓴 늑대 일부마저 이번에는 늑대에 단호히 대처해야 한다며 일방적으로 늑대 편을 들지 못하고 있다.

지금 어미 돼지가 가장 시급히 해야 할 일은 제2, 제3의 아기 돼지 학살 사건을 방지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담장을 높이 쌓고 늑대의 동태를 각별히 감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동안 잘못된 선전으로 늑대의 실상을 바로 보지 못해온 새끼 돼지들을 올바르게 교육하는 것이 필요하다.

어미 돼지의 전임자들은 늑대도 동물이니만큼 살점을 줘가며 달래면 언젠가는 돼지와 비슷해 질 것으로 믿고 살점을 상납했다. 그러나 그 후 10년이 지난 지금 늑대는 돼지를 우습게 보 고 발톱만 더 날카롭게 갈고 있다. 이 상황에서 다시 살점을 주며 화해를 청한다면 돼지는 영원한 늑대의 밥으로 전락할 것이다. 또 다시 늑대가 담장을 넘어오면 이번에는 정말 살점을 뜯길 각오를 하고 분연히 떨쳐 일어나야 늑대에게 무시당하는 수모를 면할 수 있다.

늑대가 자꾸 돼지를 건드리는 것은 돼지한테 가 집적거리면 먹을 것이 나온다는 조건반사에 익숙해 있기 때문이다. 돼지와 시비를 걸어 나오는 것은 없고 자신도 상처를 입는다는 것이 분명해지면 아무리 생각이 없는 늑대라도 돼지 집을 넘보지 못할 것이다. 이번 새끼 돼지 학살 사건으로 돼지 집은 크나큰 상처를 입었지만 이것이 앞으로 늑대의 도발을 막는 계기가 된다면 숨진 아기 돼지들도 저승에서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으리라.


민 경 훈 /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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