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댓츠 오우 케이”

2010-05-08 (토)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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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 가시고 열두 해째 어머니날을 맞는다. 병상에서 한 달간 보내시며 팔순의 삶을 넉넉한 여유와 믿음으로 정리하고 떠나신 어머님을 생각하면 죽음마저도 오랜 친구처럼 친숙하게 다가온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 고통, 신음, 슬픔과 눈물만이 있을 법한 병상에 웃음을 선사하시던 어머님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보고 싶은 사람 다 오라고 불렀다가 내가 죽지 않으면 망신하는 거 아니가?” 하시며 자식들을 웃기시던 어머님은 유머 감각을 타고나셨다.

어머님의 별명은 ‘댓츠 오우 케이 권사님’이었다. 섬기시던 교회의 목사님이 지어주신 별명이다. 매사에 낙관적이며 긍정적인 어머님은 "댓츠 오우 케이(That’s OK)"란 영어 표현을 즐겨 쓰시며 교인들을 웃기거나 딱딱한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시곤 하였다. 어머님에게는 죽음마저도 ‘댓츠 오우 케이’ 같았다.


메디케어 신세를 한 번도 지지 않은 것을 자랑하시던 어머님의 말기 위암 선고는 뜻밖이었다. 진단 결과를 통고 받은 나는 병명을 숨긴 채 간단한 수술이니 염려하지 마시라며 어머님을 입원시켰다. 그러나 어머님은 자식들의 얼굴에 짙게 드리워진 염려를 통해 당신의 병세를 짐작하고 오히려 자식들을 위로하셨다.

“팔십 늙은이 이제 죽는다 해도 누가 일찍 죽었다 하겠니? 너희들 80까지 한번 세어 봐라. 하나, 둘, 셋, 넷····”

어머님은 팔십 평생이 얼마나 긴 세월인지 증명이라도 해보이려는 듯 열다섯까지 숨 가쁘게 세신 뒤 자식들을 둘러보셨다. 그리고는 수술을 앞두고 고민하고 있는 자식들에게 쓸데없는 고민일랑 끝내라며 화제를 돌리셨다.

“수술할 때 틀니 빼구 하갔디. 틀니 빼면 꼴사납디. 너희들 수술 끝나자마자 잊지 말고 틀니나 끼워 달라”

수술 다음날 어머님은 통증이 심해 밤잠을 설쳤다며 나에게 질문을 하셨다.
“거 진통제가 영어로 뭐디? 내가 영어로 설명을 해 줘도 간호사들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먹지 않니. 할 수 없이 아픈 거 꾹 참았디”

평양 서문 여고를 나오신 어머님의 학구열은 대단하셨다. 어머님 앞으로 배달되는 영문 우편물은 꼬박꼬박 사전을 찾아가며 나름대로 번역을 하셨다가 나에게 번역이 맞느냐고 항상 물으셨다. 미국 시민권 문제 영어 녹음테이프를 들으시며 시험 준비를 하시던 모습과 시민권 인터뷰를 통과하시고 기뻐하시던 모습이 어제 일처럼 눈에 선하다.

어머님의 수술 소식이 전해지자 병상을 찾는 교인들과 친지들의 발길이 이어졌고 병실에서는 찬송과 기도소리가 끝이지 않았다.


“나 위해 기도하는 사람 너무 많아 내가 너무 오래 살게 될까봐 이젠 걱정이 됩네다.”

어머님의 문병 답례에 문병객들은 굳은 표정을 풀고 밝게 웃었다.

수술이 성공적이라는 집도의의 말과는 달리 병세는 급속히 악화되었고 어머님의 말씀 가운데 죽음이란 단어가 끼어들기 시작했다.

“나 죽으면 하아-하아- 소리 내서 웃으라. 이렇게 아프다 죽으면 얼마나 편안하간. 나 죽은 다음에 너희들 울면 믿음 없는 탓인 줄 알라”

어머님의 전매특허 같았던 ‘댓츠 오우 케이’ 속에는 어떤 역경도 결국 지나가리라는 믿음이 담겨있었다. 30 초반부터 열 살 미만의 자식 넷을 키우신 어머님에게는 그런 믿음이 없이는 생존 자체가 불가능했을는지 모른다. “악을 선으로 갚겠다”고 남편 살해범을 용서하여 장례식장을 가득 메운 일천여 조객의 마음을 울렸던 어머님이셨다.

어머님은 평생 화를 내거나 큰소리를 낸 적이 없으셨다. 어머님을 닮지 못한 나는 가끔 화를 내거나 큰 소리를 내고 후회를 하며 산다. 어머님은 남의 험담을 결코 않으셨으며 험담을 전해 듣는 것도 부담스러워 하셨다. 나에게도 혹시 이런 면이 있다면 어머님의 유산임이 분명하다.

어머님의 육신은 한 줌 비옥한 흙이 되어버렸을 터이지만 이 땅에 남기고 가신 믿음 그리고 사랑은 어머님이 차지했던 공간들을 넘치도록 채우고 있을 것이다. 화장실에 가면 오래 있는 나에게 “나 죽기 전엔 돌아오라”농담을 건네시던 어머님이 보고 싶다.


황시엽 / W.A. 고무 실험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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