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연탄불 변호사

2010-04-08 (목)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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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성애 수필가

아주 오래 전 일이다. 비빌 수 있는 배경도 없었던 우리의 미국 생활은 황무지를 개척하듯 도전의 연속이었다. 달랑 MBA 졸업장 하나 들고 생활 전선에 뛰어 든 우리의 자산은 이제 갓 이민을 온 사람들에 비해 의사소통이 약간 자유롭다는 것과 무슨 일이든지 하겠다는 각오가 전부였다.
오직 그런 각오로, 여름 한 철 뛰는 메뚜기처럼 죽을 힘을 다해 뛰다 보니 우리에게도 기회라는 것이 찾아왔다. 꽤 통통한 투자의 기회를 잡았는데 자본금이 턱없이 부족했다. 우리는 가지고 있던 자금을 탈탈 털어서 착수금을 걸어 놓고 변호사를 선임했다. 키가 크고 깡마른 50대 중반으로 보이는 백인 변호사였다.
어떻게 하면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잡을 수 있을까를 함께 고민하다 보니 눈깜짝할 사이에 변호사 비용이 만 불을 훌쩍 넘어섰다. 그런 상황에서도 변호사는 우리에게 변호사 비용을 일부분이라도 지불하라는 한마디의 말도 없었다. 만약에 계약을 성사 시키지 못하면 착수금 포기는 물론 변호사 비용을 고스란히 물어내야 하는 아슬아슬한 도박이었다.
잔금을 치러야 하는 마감일은 착수금 지불 일로부터 30일이었다. 다행히 투자를 하겠다는 사람이 나서서 우리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그런데 마감 3일을 남겨 놓은 상태에서 그 투자자는 투자 의사를 철회하고 말았다. 위험 부담이 너무 크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충격은 갑자기 방향을 바꿔 돌진하는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투자와 관련된 거실에 쌓여 있는 서류 박스들의 무게가 우리의 의지와 함께 저울 추에 올라 있는 것만 같았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단 72시간. 시계의 초침이 채깍채깍 소리를 내며 한 눈금씩 기울 때마다 그 서류 박스의 저울 추도 기울고 있었다. 3일 만에 새로운 투자자를 찾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우리는 급전을 약간 구해 착수금을 좀 더 지불하고 다시 30일 연장을 받아 냈다.
30일 연장을 받아 놓은 다음부터가 더욱 문제였다. 돈 가방을 들고서 우리가 포기하기만을 기다리는 팀이 두 팀이나 나타난 것이다. 그로 인해 변호사의 문턱을 넘나드는 일이 더욱 잦아 졌다.
아직 뽀송뽀송한 피부를 가진 동양인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해보겠다는 의지에 인생을 살만큼 살아온 그 백인 변호사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남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문을 열었다.
“당신이 부럽습니다.”
꽤 잘 나가는 변호사가 겨우 서른 두 살의 앳띤 동양인에게 한 말이었다. 벼랑 끝에 서 있던 남편은 그 변호사의 말에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당신이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제가 부러울 게 뭐가 있습니까?” 그러자 그 백인 변호사는 아주 진지한 눈빛을 남편에게 던지며 말했다. “도전할 수 있는 당신의 그 용기가 부럽습니다. 우리에게는 그런 용기가 없습니다. 안주하려고만 하지요. 바로 그게 이민자들과 저희들의 차이입니다.”
“…….”
남편은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자 그 백인 변호사는 더욱 놀라운 말을 남편에게 던졌다. “미스터 김. 변호사 비용은 걱정하지 마세요. 만약에 이 건이 성사 되지 않으면 변호사 비용을 한 푼도 받지 않겠습니다.”
“……!”
그 당시 변호사 비용은 2만 불을 웃돌고 있었다. 그 아름다운 마음에 눈물을 흘리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남편은 울먹이며 그 변호사에게 말했다. “아뇨. 이 건이 성사되지 않더라도 당신의 수고비는 꼭 갚겠습니다.”
물론 그 비즈니스는 결국 성사되었고 변호사 비용도 모두 갚을 수 있었다.
경제적인 빙해에서 망연자실 서 있던 우리 곁에 연탄불을 피워 주고 떠난 그 백인 변호사의 훈훈한 온정이 아직도 남아 있기에, 귓불을 후려치는 겨울 바람 속에서도 봄빛과 같은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용기를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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