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내를 기다리며

2010-04-07 (수)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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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서둘러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큰 처남의 암이 몸의 여러 부위로 전이 되어 얼마 살지 못할 거라는 소식을 듣고 나서였다.
슬픔에 잠긴 아내가 죽기 전에 동생을 보는 게 낫다며 갑자기 일정을 잡았다. 수년전 가족이 함께 모국 방문을 한 적은 있지만 결혼 후 한 번도 하루도 가족이 떨어져 본 적이 없는 터였다. 처남의 불행도 가슴 아픈 일이지만 당장 아내 없이 일곱살, 아홉살 두 아이를 돌보는 일이 내겐 큰일이었다. 그렇다고 우리의 생업인 가게 일도 내가 손을 놓을 처지는 아니었기에. 아내는 아내대로 나는 나대로 처음으로 가족을 떠나고 보내야 하는 일로 스트레스가 쌓이는 데다 그게 안 좋은 일로 가는 거라 서로 신경이 예민해졌다.
그래서 체류기간, 경비문제 등으로 은근히 트집을 잡으며 작은 말다툼으로 시작한 것이 막말로 이어지고 급기야는 큰 싸움까지 하게 되었다. 슬픈 일로 먼 길 떠나는 아내에게 참으로 해서는 안 되는 가슴 아픈 말들을 그때는 홧김에 마구 해대었던 것 같다. 떠나는 날 공항 탑승 게이트 입구에서 아내는 차마 무거운 발걸음을 쉽게 떼지 못하고 연신 나와 아이들을 뒤 돌아봤다.
다음날 새벽 여섯시 반부터 내겐 새로운 일과가 시작 되었다. 느지막이 일어나서 출근하던 내가 해도 뜨기 전에 깨어 아이들 아침 해 먹이고 입히고 학교에 데려다 주는 일부터 시작해서 오후 세 시엔 픽업을 위해 또 학교에 가야 했다. 간단히 무얼 먹이고 나면 태권도, 피아노, 댄스 학원 등으로 시간 맞춰 다녀야 했고 끝날 때를 기다려야 했다. 집에 가면 또 저녁준비, 밥 먹이고 학교숙제 봐주고 빨래까지 하고 나면 아이들은 자야할 시간이 되었다. 차라리 가게에서 박스를 나르는 게 낫지 이게 보통 일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정신없는 며칠이 지나고 나서야 조금씩 깨달아지는 생각 때문에 마음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지난 십년간 내가 한 번도 직접 해보지 않은 일을 그저 쉬운 일로 생각하고 아내에게 했던 모든 잔소리와 구박과 불평불만 들이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돈 좀 벌어 온다는 이유로 사실 그것이 가장으로서 당연한 의무였을 뿐인데도 제왕처럼 행세하고 대접만 받고자 했다. 아내를 하녀 다루듯 무시하고 마구 부리려 한 적도 있었다. 저녁때면 전화해서 오늘은 자장면 내일은 짬뽕 또 오늘은 메밀국수 이런 식으로 오더를 해놓고 집에 들어가면 어김없이 그 메뉴가 차려져 있었다. 이제 보니 큰 애는 양식 작은 애는 한식 나는 중식을 좋아하니 어떤 날은 세 가지 요리를 다 해야 했을 거다. 그래도 아내는 제각기 입맛에 맞는 요리들을 따로 만들어서 우리를 먹였고 나는 그저 당연하게 먹었을 뿐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었는지에 대한 생각도 감사하는 마음도 없었다.
내 삶의 반려자이며 사랑하는 내 아이들의 어머니인 아내에게 조금의 이해나 존중도 없이 단지 나의 아집과 독선으로 대하고 말하고 행동해 온 것에 대한 뒤늦은 후회가 내 마음을 아프게 짓누르며 다가 왔다. 이미 십년이나 지난 지금에야.
전화를 했다. 처남 상태를 묻고 최근 눈 수술을 하신 장인어른을 걱정하는 얘기며 그리고 다른 처가 식구들 걱정도 있었다. 혼자 미국으로 시집 온 맏딸로서 그 짧은 방문기간 동안에 해야 할 일이 무척 많은 듯 했다. 아이들은 엄마랑 반갑게 통화하면서도 언제 오느냐고 엄마 마음을 아프게 했다.
지난 며칠 간의 내 생각 때문인지 아내의 목소리는 더없이 애틋하고 힘겹게 들렸다. 그저 미안한 생각 뿐 달리 해줄 얘기가 생각나지 않아 그냥 전화를 끊으려는데 아내가 힘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 나 당신이 보고 싶어...” 속에서 울컥 뜨거운 것이 올라오다 목에 턱 걸린다. 눈가로 뜨거운 무엇인가가 가득 몰리면서 눈앞이 자욱해진다. 말 없이 전화를 끊었다. “나도 보고 싶어”라는 입 안을 벗어나지 못한 나의 말 한마디가 공허한 메아리로 맴돌다 가슴을 때리며 진한 슬픔 속으로 잦아들었다.
이젠 아내의 귀환을 기다리고 있다. 남은 세월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를 생각하면서. 박동언 /솔즈베리,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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