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나지만 집 사람의 건강을 위하여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이틀에 한 번씩 ‘발리’에 간다. 가서는 20여분 운동을 하고 수영을 한 후 사우나에 들려서 땀을 흠뻑 빼고 샤워를 하고 온다.
그런데 사우나에 들어가 앉아 있노라면 언제나 만나는 중년 흑인 남성이 있다. 그는 들어서자마자 ‘원데이,’ ‘원데이’라고 외치며 인사를 건넨다. 파편인지 총상 때문인지 오른쪽 허벅지가 흠뻑 파여 절름거리는 그이다. 처음엔 거북하기도 하고 어색하였다.
그러나 상대방과는 아무 상관도 없이 ‘원데이,’ ‘원데이’라고 외쳐대는 그를 이제는 만나지 않는 날은 웬지 허전하다. 오늘 또 ‘원데이’를 만났다. ‘원데이,’ ‘원데이’ 오늘은 최고의 날이다. 오늘은 은총의 날이다. 오늘은 축복의 날이다. 오늘은 기적의 날이다. 여전히 중얼거린다.
하여 가벼운 인사를 나누고 뭐가 그렇게 ‘원데이’ 좋은 날이냐고 묻자 수도꼭지를 틀면 쏟아지는 물처럼 쉬지 않고 말을 이어간다.
그는 내 추측대로 상이 군인이었다. 이라크전에도 참전하고 걸프전에도 갔었다는 그는 그 숫한 전쟁터에서 겪었던 일을 털어 놓으면서 오늘 내가 이렇게 살아 있다는 것이 기적이요,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냐고 큰 눈을 부라리며 나에게 반문한다.
그럴 것이다. 전쟁터에서 부상을 입고 생과 사의 능선을 넘나든 사람은 살아있다는 오늘이야 말로 바로 벅찬 감격의 그 날이 아닐 수 없으리라. 그렇다 살아 있다는 그것 하나만으로도 오늘은 충분히 감사한 날이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기쁨을 빼앗긴 후에야 기쁨이었던 것을 그때서야 알고 행복도 지나간 후에야 그것이 행복이었다는 것을 안다면 행복할 때는 행복인지 몰라 불행하고 불행할 때는 불행해서 불행하다면 과연 그 언제 감사하며 살 수가 있겠는가.
벌써 오래 전에 읽은 글이지만 여전히 교훈을 주는 이야기가 있다. 선물로 받은 한 광주리 사과를 먹는 두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나쁜 사과를 먼저 골라 먹으면서 불평을 한다. 그런데 한 사람은 좋은 사과를 역시 먼저 골라 먹으면서 감사한다. 여하튼 한 광주리의 사과를 먹기는 마찬가지다. 그런데 한 사람은 언제나 나쁜 사과만을 먹고 한 사람은 언제나 제일 좋은 사과만을 먹는다. 그렇다 우리가 선물로 받은 인생을 사는 태도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불평하는 것은 반드시 무엇이 없어서가 아니라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에 불평하는 것 아닌가.
11월이다. 11월은 추수감사절이 있는 ‘감사의 달’이다. 감사절의 유래도 실상은 그렇다. 1620년 춥던 겨울 매사추세츠주 프리머스항에 도착했던 청교도들이 드렸던 첫 번째 추수감사절은 그야말로 궁핍 속에 감사절이었다. 우리가 다 아는 대로 말로는 형언하기 어려운 악조건에서 그래도 드린 눈물 진한 감사절이었다. 인간적인 조건에서 볼 때 도저히 감사와 찬양을 드릴 수 없는 환경이라 할지라도 그래도 감사하고 감사의 예물을 드려보자. 그래야 믿음의 사람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