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앤 여사의 처녀시집을 통해 그녀의 자연회귀를 꿈꾸는 소박한 시정신을 읽을 수 있었다.
시집 표제인 ‘못다 지은 집’이 상징하는 것은 오늘의 인간이 ‘자연’으로 돌아가기를 소망하고 있음을 뜻한다. 그것은 마치 모태회귀본능설이나 성선설과 같이 인간이 타고난 선량한 성품을 뜻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한 루소의 철학적 명제와 같이 “인간의 천성적인 착함”과 천연의 자연 상태에서 존재했던 “선한 인간 정신”으로의 귀향을 갈망하는 의식이 바탕에 담겨 있다.
<~집을 짓던 새 한 쌍/어느 날 큰 소리로 토닥거리다/홀연히 버리고 떠났네/못다지은 집/~//버려진 집은/쓸쓸하고 적막해/언제쯤 느껴 볼 것인가/들었던 주인의 체온 한 줌>(‘못다 지은 집’에서)
시인은 새들이 집짓기를 하다 버려두고 떠난 쓸쓸한 자연풍경에서 인간이 ‘자연’에서 떠나 방황하는 정신적 무잡성(무잡성)을 자각하고 허망함과 비애감을 절감하고, ‘자연의 생명성’을 복원하고자 하는 시정신이 발동한 것이다.
‘할매 손’ ‘바닷소리’‘목련’등의 시편들을 읽으면 시인의 고향과 가족, 이웃들과의 그리움과 인정이 작품마다 묻어난다.
‘할매 손’은 옛 사람들의 삶의 지혜를 돌아볼 수 있다는 점, 아울러 이를 통해 말린 감 껍질을 보며 <~껍질처럼 마른 손/~/~ 마른 잎 같은 손>으로 치환된 연상 작업이 이 작품의 시적 구조요 ,시적상상력으로 완결된 것이다.
‘바닷소리’에는 <내 깊은 곳의 혼 흔들어 깨우는/바다 그 태초의 소리 때문에>시적 화자를 깊은 사색의 여울목으로 인도한다. 바다는 인류의 문명이 아직 범접하지 못하는 태초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인간의 이상과 영혼의 안식처가 숨겨져 있는 낙원의 벽으로 남아 있는 곳이다. 즉 <바다에 갔다 오면/나는 꿈속에서 늘/바닷소리를 듣>고 있는 신성이 영역으로 귀를 모우고 있는 것이다.
‘목련’은 절제된 시어로 목련의 최후를 스케치한다. 화사한 아름다움, 그 찰나적인 절정의 사리짐을 감정이 없이 스케치만 했다. 시인의 꿈과 이상이 미련없이 사라진 비애미(비애미)가 잠언이 되었다.
<~/저녁 미사가/오늘은 분심(분심) 속으로 나를 밀어 넣는다/그치지 않고 뒤에서 소곤대는 소리(중략)//미사가 끝난 후/할아버지의 부축을 받으며/더듬더듬 걸어 나가는 할머니의 손에 쥐어진 하얀 지팡이/눈 먼 할머니에게 예절이 진행되는 것을/ 할아버지는 일러 주고 있었구나//마지막 석양이/노부부의 등에 잠시 머물다가 사라졌다.>(‘저녁 미사’에서)
아름다운 노부부의 따뜻한 사랑과 신실한 신앙행위를 시인은 자신의 미사와 비교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은 아닐까. “마지막 석양이/노부부의 등에 잠시 머물다가 사라졌다”는 시구는 여운을 남기는 절창이다. 이 두 줄의 시구가 주는 막막하고 허무함, 아쉬움을 교차시키는 정서는 무엇일까. 시인은 노부부의 돈독하고 진실한 시랑과 신앙심을 깨달아 아는 순간이 되지 않았을까. 이 시에서 작품의 주제를 찾아보는 것은 무모한 일이 될 수도 있다. 다만 주어진 상황 속에 각자 변화하는 심리적 정서를 공유할 수 있다면 최상의 감상이 되는 것이라고 본다.
시인은 한 순간 사라지는 햇살의 아쉬움을 통해 섬광처럼 스치는 묵시를 받았을 수도 있다. 다만 시인은 그 계시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해독하지 못하고 아쉬움만 남긴 채 “텅 빈 성당 문”을 열고 나선다. 저녁미사와 노부부와 그리고 스스로의 심적 갈등이 교차하는 아쉬움의 정서가 작품을 지배한다. 아 같은 작품을 통해 시인의 신앙의 경지를 읽을 수 있었다.
박 앤의 처녀시집은 알알이 익어 떨어지는 밤알처럼 튼실한 수확이 되었다. 일찍이 릴케가 한 말 가운데 “젊어서 쓴 시는 무의미하며 평생을 기다려 노년기에 몇 줄의 시를 써야 한다”고 한말이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