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영이라야 중국 성황당이다 보니 정문에 보초가 있을 뿐 주위는 철조망으로 에워싸였는데 철조망도 오래된지라 녹슬고 쉽게 부러져서 빠져 나오기 쉬웠고 성곽에 망루가 군데군데 있는데 일군이 지키는 것이 아니라 왕조명 괴래 정권의 이른바 화평군이 지키는데 잠자는 파수군이라 할 만큼 그들의 휴식처가 되었으므로 안심하고 접근할 수 있었다. 허나 문제는 키가 작은 내가 성벽을 쉬 넘을 수 있을까였는데 키가 큰 정치학도 이 군이 허리를 굽혀 발등상이 되어 어려움 없이 넘어 미끄럼 타듯 밑으로 내려갈 수 있었다.
80이 넘은 요즘 작은 키가 더욱 작아짐을 느끼는데 뼈와 뼈 사이에 연골이 마모되는 노화현상을 어쩔 수 없다는 진단이다. 오 형제 중 막내인 나만 오 척 단구이지 형들은 모두 보통 키인데, 영웅 나폴레옹이 키가 157이고 박정희 전 대통령이 나와 같은 164였다 하기에 많은 위로를 받는다는 우스갯소리를 가끔 하곤 한다.
정보실에서 또는 소대장에 의해 적정 상황설명 등을 들은 바대로 북쪽 방향으로 정신없이 달리는데 과연 그의 이야기대로 교통호가 나타나고 이어 촌락이 시야에 들어오며 개 짖는 소리를 들을 수 없음을 알게 되어 제대로 찾아 왔음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일단 제대로 왔음에도 더 깊이 들어 갈 양으로 걸음을 옮기려는 찰라 검은 그림자 군이 나타나 우리를 에워싸는 게 아닌가.
그 중 대장인 듯한 남자가 권총을 들이대며 몸수색을 하고 부대에서 나올 때 잡히면 자결하려고 준비한 수류탄을 내보이며 손짓발짓으로 우리의 신분을 밝히려 노력했더니 알아듣는 듯, 우리를 이끌어 큰 집으로 데려갔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 곳은 촌장이 사는 곳이었다.
말이 전혀 통하지 않아 간신히 붓과 종이를 구해 내가 붓으로, ‘我等(아등), 朝鮮人 學徒兵出身(조선인 학도병출신) 爲朝鮮獨立鬪爭 脫出了(위조선독립투쟁 탈출료)’라고 썼더니 촌장이 기립하여 박장대소하며 ‘환영, 환영’하며 반기는 것이 아닌가. 잠시 후 술과 안주를 내어주며 오늘은 편히 쉬라고 한다. 그러나 불안한 마음에 우린 더 멀리 가고 싶다고 하니 날이 밝으면 본부로 갈 것이니 안심하라 한다.
다음 날, 우리는 민병들의 호위를 받으며 조랑말을 타고 사단본부로 향했다. 본부에 당도하니 그 곳에서도 대환영이다. 이곳에서 처음 만난 사람이 대적공작부장(對敵工作部長) 료일범(廖一帆)이다. 이 사람은 동경일고 별과 출신으로 일어가 유창하고 주로 일본군 포로를 관리하는 부서의 책임자이다. 일본군 포로들과 같은 처소에 수용하는데 불만을 토로하니 그는 웃으면서, ‘이분들은 포로가 아니라 일본 인민의 해방을 위해 싸우는 전사들이며 일본해방연맹회원’이란다.
일본 인민해방연맹 본부를 연안에 두고 있으며 그 지도부책은 오까노스스무이며 본명은 노자까산조였으며 46년 1월 한반도 경유 귀국 일본 공산당 재건에 압도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우리들의 요구가 타당 타 생각했는지 받아들여져 별개 숙소에서 기거하자 같은 부대에서 탈출한 이재극과 전의택이 합류함으로 우리의 활동은 활기를 띄게 되었다.
우리가 탈출한 지역이 신사군이 장악한 곳이었기에 국공합작 제2기지만 국부군 쪽을 희망한다 하더라도 탈출자에게는 선택의 자유가 있을 수 없었다.
신사군이란 신편 제4군의 줄인 말로서 중국공산당이 자랑하는 저 유명한 2만5천리장정(1934년 10월-1936년 10월)에 참가한 국민혁명 제8로군 외에 각성에 산재해 항일전쟁을 치루는 유격대를 집결시켜 새로이 편성한 부대를 지칭한다.
신사군 적공부대에 소속된 우리의 활동은 자연 그들의 지휘 하에 있게 되어 독자적 공작은 허용되지 않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