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네디 가문의 조종(弔鐘)
2009-09-02 (수) 12:00:00
민주당의 큰 별 하나가 사라졌다. 높은 자리는 빈자리도 크다. 에드워드 케네디가 세상을 떠나며 20세기 케네디 가(家)의 카리스마는 막을 내렸다. 9남매 중 아들 네 명이 모두 죽었다. 첫째는 비행기 사고로, 둘째인 존은 대통령 재임 중에 암살당했고(1963), 셋째인 로버트는 대통령 후보 선거 유세 도중에 총격(1968) 당했다. 넷째인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애칭 테디)은 지난 주 뇌종양 투병 1년 3개월 만에 77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그는 대중들에게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 가문의 유일한 생존자로 기억돼 왔었다. 지난 47년간 상원의원으로 미 의회사의 산 증인이었다.
장례식에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에드워드는 힘없고 가난한 사람을 대변했다”고 말했다.
에드워드는 미국 자유주의 성향의 진보 정치인을 대표하는 자리매김을 했다. 그는 지한파 정치인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의 대북 정책 노선인 ‘햇볕 정책’을 지지했으며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의 대북 강경 노선을 비판했다.
그는 2,500여 법 제정을 제안했으며 총 투표수는 1만5,235번에 달한다. 그 중에는 아직도 유효한 의료 건강지원법(2008), 약물 치료법(1978, 1996), 이중언어교육 강조법(1968), 연방 공무원 권리 보호법(2008), 생명과학 자료의 차별대우 방지법, 군인가족 지원 법안(1985), 상이군인 지원 법안(2008) 등이 있다. 그는 민권법, 이민개혁, 교육개혁, 의료보험 등에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현재도 백악관의 중요한 참모진과 보좌관 중 13명 중 8명이 의원 빌딩 내 에드워드 의원 집무실 ‘317호’출신들이다.
에드워드의 보좌관과 직원들은 초선의원 시절(1962)부터 한결같은 끈끈한 유대감을 유지하고 있다. 이유는 에드워드에 대한 충성심 때문이다. 에드워드는 각별한 열정과 진심어린 자세로 직원들을 대하며 마음을 열고, 귀를 열고, 앞을 보았다. 그래서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번 그의 부하직원이 되면 신뢰를 받고 우수한 동지가 되었다.
사실 이라크 전쟁 참여를 완강히 반대한 그는 전사자 가정마다 애도의 편지를 보내며 위로해 왔다.
에드워드도 뼈아픈 시련을 겪었다. 나이 30세(1960년)에 상원에 들어갔으나 애송이 의원으로 정치 가문의 명예를 계승할 책임을 짊어졌지만 두 형이 너무 뛰어난 탓에 ‘존의 지성’과 ‘밥의 열정’이 부족하다는 비난을 면치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연소 민주당 대권후보로 낙점돼 있었다. 그러나 여비서 익사 사건으로 법정에서 2개월의 집행유예를 받았고 정치적 야망은 여론의 종신형에 처해져 추락했다. 보스턴 시청광장에는 “저 멍청한 사람(Bum)을 탄핵하자”는 시위(1974)가 벌어지기도 했고 절망에 빠진 에드워드는 술에 빠져 들었다. 첫 부인과의 결혼생활은 이혼(1981)으로 깨졌다.
암울한 때에 위대한 케네디의 전설을 만든 현재의 아내 빅토리아(애칭 비키)가 그에게 나타났다. 시사 주간지 타임은 “비키가 케네디를 구원했다”고 평했다. 당시 비키(37세)는 아이 둘을 키우는 이혼녀였고 테디는(59세)로 궁지에 몰려 있는 상태였다. 정치권에서는 ‘형식적인 결혼’으로 보며 험담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이 두 번째 결혼은 케네디의 운명을 바꾸었다.
실제로 이번 장례식의 총지휘 감독도 미망인 비키가 관장했다. 에드워드의 상원의원 공석(空席)도 비키가 채울 조짐이다.
‘멍청이’ 막내가 영웅이 되었다. 테디는 하버드대학교(1956)와 버지니아 대학교(UVA) 법과대학을 졸업(1959)하면서 평생의 좌우명을 “나는 공직생활로 자유와 정의를 항해하면서 미래를 헤쳐 나간다”로 삼았다.
그의 성공의 비결은 가톨릭 신앙, 아일랜드 조직과 충성심, 그리고 정치인 가문의 영향력으로 풀이된다. 그는 한 시대를 멋지게 살다간 한인들의 친구였다. 그의 안식을 빈다.
김현길
지리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