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4회 광복절을 맞이하여 내 나이 미수(米壽)를 앞두고 있고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지금 더욱 감회가 깊다.
미일 전쟁의 중반 일본의 퇴색이 짙어가던 1943년 일본 정부는 학도 동원령을 선포했다. 곧이어 반도 출신 조선인 대학생의 강제 징집에 이르게 되는데 나는 1944년 1월 20일 평양 42부대에 입대 후 중국 대륙에 파견되었다. 얼마 안지나 나는 부대를 탈출했다.
이미 세상을 떠난 동지들을 기리며 당시를 회상해 본다.
공산군 지역에서 당시 소위 국공2기라 할지라도 탈출자에게 선택의 자유가 허용되지 못해 나는 조선독립동맹화중분맹(朝鮮獨立同盟華中分盟)과 조선의용군(朝鮮義勇軍) 제5분교(第分校) 항일군정대학(抗日軍政大學))에서 사상교육과 군사훈련을 받았다.
해방 후 남과 북이 분단되리라 예견이라도 하는 듯 사상 무장의 목적으로 훈련생 중 두 동지를 내세워 논쟁을 벌이게 하였는데 공산주의 측은 신상초, 자유민주주의 측은 최일운이 나서 불꽃 튀는 논쟁을 벌였다. 신상초는 동경대학 법학부, 최일운은 일본 와세다대학 철학부 출신이었다. 주제는 두 주의가 보는 헤겔의 변증법이었다.
논쟁이 끝난 후 당시의 그 지역 공산 이론가이며 지도위원인 손달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조국이 지향할 바는 자명하다는 듯 신 동지를 예찬했다.
한편 동지 중 와세다 사학부 출신 엄영식이 있었는데 그는 한국사 독립 운동사를 강의했다.
귀국 후 신상초는 언론인 그리고 정계에서 국회의원을 지냈고 최일운은 전북대학원장과 우석대학 총장을 지냈다. 각각 60세, 80세에 작고했다.
사학가 엄영식은 경희대학원장을 역임하고 84세에 역시 작고했다. 현 생존자는 서울에 거주하는 심영순과 그리고 미주에 있는 나 안국두뿐이다.